崔禹錫(삼성경제연구소 소장)
이번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대해 일본측의 응대는 매우 융숭한 것이었다. 일본 황거(皇居)에서 열린 궁중만찬회 광경을 NHK TV로 생중계까지 했다. 보통 국빈 만찬회는 식사가 끝나고 주최측의 환영사와 주빈의 답*사가 이어지는 것이 관례인데 이번은 TV 생중계 때문인지 환영사와 답사를 먼저 하고 식사를 뒤로 돌렸다. 만찬회에서 金대통령이 답사를 하러 일어서자 천황이 마이크 높이를 잡아주는 광경까지 생생히 나갔다.
일본측은 마음먹고 돈독한 한일관계를 알리려는 것 같았는데 일본 매스컴도 그에 장단을 맞추듯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측에서 이번 궁중만찬회 공식참석자가 167명으로서 시라크 대통령 때의 기록을 깨고 사상 최대였다는 것까지 PR했다. 아마도 과거사는 일단 매듭짓고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자는 것, 천황의 한국 방문을 공식 요청한 것 등에 호감을 갖지 않았나 싶다. 워낙 지난날의 세련되지 못한 표현과 거친 외교에 질렸다가 우호적 무드로 돌아오자 한숨 돌렸는지 모른다.
오와비(공동わび)의 번역을 둘러싸고 한국은 사죄, 일본은 사과의 뜻이라고 실랑이가 있었다는데 그것은 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일회담에서 누차 경험했지만 일본 실무진들의 깐깐함은 정평이 나 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타결을 봐도 실무진들은 끝까지 버틴다. 일본과 중국이 국교정상화 회담을 할때 일본 실무국장이 하도 깐깐하게 따지며 버티자 당시 주은래(周恩來) 중국 수상이 알량한 법률지식 때문에 두나라간의 큰 관계를 망치는 법비(法匪)라고 호통을 친 일도 있다.
한일회담때도 『일본은 한국의 5개년 계획을 적극 지원한다』는 표현을 놓고 「적극」을 빼자, 못 뺀다를 두고 몇시간씩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봤다. 이렇듯 일본은 겉으론 매우 융숭하고 예의를 다하지만 결코 속을 다 주지 않고 뒤를 남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것이 있다면 한국은 자금협력을 요청하고 일본은 늘 방어적 태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요 몇년간 일본에 대해 아쉬운 소리를 안했는데 IMF사태로 다시 손을 벌리게 됐다. 흔히 굴욕외교란 말을 많이 하는데 30여년동안 돈을 빌려쓰면서 큰소리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오와비란 뜻도 우리가 잘해 당당하고 의연하게 일본을 대할 수 있으면 사죄가 될 것이고 우리 스스로 앞가림을 못해 아쉬운 소리를 계속하면 사과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