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미국과 일본의 짝짜꿍, 이시이 랜싱 협정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1월2일 워싱턴DC. 로버트 랜싱(Robert Lansing) 미국 국무장관과 일본 특사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郞)가 협약을 맺었다. 이름하여 이시이 랜싱 협정의 골자는 중국에서의 일본의 특수이익 인정. 양국의 ‘기회균등’을 확인하되 중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일본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조선의 교차지배를 약속한 가쓰라 태프트 협정의 중국판 격인 이 협정의 배경은 일본의 급격한 부상. 유럽을 무대로 펼쳐진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억지를 써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 태평양의 독일 식민지와 중국의 독일 조차지( 租借地)인 칭따오(靑島)를 점령한 일본의 팽창을 부담스러워했던 미국은 ‘특수이익(special interests) 인정’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동원해 일본의 급부상을 제어하는 동시에 중국에서 일본과 동일한 권리를 확보했다고 여겼다. 일본은 일본대로 중국 북부, 특히 만주 지역에서 일본의 배타적 이익을 미국이 인정했다고 생각하고 중국 침략의 고삐를 더욱 당겼다.


문제는 당사자인 중국에 의견조차 묻지 않았다는 점.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유럽 열강마저 경악시킨 일본의 무리한 요구(21개 조 요구, 1915년)에 따른 반작용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된 중국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시위가 번졌다. 베이징 정부는 협정 자체가 무효라는 성명서를 냈다.

이시이 랜싱 협정은 미국과 중국ㆍ일본, 영국을 비롯한 유럽 6개 나라가 ‘중국에서의 기회균등’에 합의한 9개국 협정(1922)으로 폐기됐어도 1920년대 내내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기본으로 작동했다. 일본에 유리한 협정을 체결한 배경에는 친일 미국인들의 입김이 서려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위드로 윌슨 등 역대 대통령들은 물론 절대적인 자본 동원능력으로 월 스트리트를 지배하던 모건 하우스도 일본과 중국의 신용도를 비교하며 사사건건 일본 편을 들었다.

이시이 랜싱 협정 98주년. 한국과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수탈한 제국주의는 시대의 유물로 사라졌다지만 동아시아에서의 국제 역학 관계는 미묘하게 돌아간다. 잠에서 깨어나 팽창하려는 중국을 놓고 미국과 일본의 이해가 또 다시 맞닿았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은 침략 만행마저 부인하는 일본과 손을 잡고 말았다. 남중국해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이해와 자존심이 충돌하며 긴장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이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여길지 궁금하지만 관건은 우리다. 일제 침략에 힘없이 국권을 강탈 당했던 구한말과 오늘날의 한국은 비할 바가 아니나 소용돌이치는 동북아 정세를 제대로 읽고 헤쳐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큰 현실 아래 시나브로 다가오는 듯한 역사의 반복 가능성에 오한이 난다. 두렵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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