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추가 경기 부양책에 나서면서 미국과 유럽의 통화정책이 단순한 디커플링을 넘어 정반대의 길을 걷는 '그레이트 디버전스(Great Divergence)'가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달러화 강세, 유로화 약세의 속도가 가팔라지면서 지난 2002년 유로화 출범 이후 처음으로 '1달러=1유로'를 의미하는 '패리티'의 연내 현실화 가능성도 고조되고 있다.
ECB는 3일(현지시간)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주재로 통화정책 회의를 열고 예치금리 인하, 양적완화 확대 등 추가 부양책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양적완화 기간 연장 △양적완화 규모 확대 △자산매입 대상 확대 △금리 인하 등 다양한 부양책이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ECB가 추가 부양에 나선 것은 경기 회복세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물가상승률이 여전히 0%대에 머물러 있는 등 디플레이션 우려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번 ECB의 결정으로 유럽과 미국의 통화정책은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오는 15~16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할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Fed는 이날 재닛 옐런 의장을 비롯해 지방 연준 총재까지 나서 금리 인상을 시사했다.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장에 금리 인상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FOMC가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을 70% 이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은 돈 풀기에 여념이 없는 중국과 신흥국도 마찬가지다. 통화정책이 미국 대 유럽을 포함한 비(非)미국의 구도로 재편되는 셈이다. 미국과 함께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중국은 올해 경제성장률 7% 달성이 어려워지면서 금융완화에 나서고 있고 그동안 미국과 공조해 금리인상에 나설것으로 예상됐던 영국조차 내년까지 확정적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최근 공언한 상태다. 대부분의 신흥국도 금리를 내리고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등 경기부양에 올인하고 있다.
통화정책 엇박자로 세계 경제는 사상 유례없는 시험대 앞에 서게 됐다. 우선 달러화와 유로화 통화가치가 빠르면 연내 사상 처음으로 등가를 이루게 될 것이 확실시된다. 유로화는 2002년 첫 출범 이후 줄곧 달러화보다 높은 가치를 유지했지만 올해 ECB의 양적완화, 그리스 위기 등 각종 악재가 겹치면서 가치가 급락한 상태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올해 안에 패리티 현상이 현실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유럽 자본이 미국으로 대이동할 경우 패리티를 넘어 유로화 가치가 달러보다 낮아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는 세계 각국 금융시장과 수출·수입 등 실물시장, 원자재 가격에 대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각국 통화정책의 불확실성도 한층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연준의 '나 홀로' 금리 인상으로 미국으로 자본이 대거 유입되면 유럽과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경기침체가 가속화할 수 있다. 신흥국 자본이 미국으로 유출되면서 각국의 주가가 하락하고 기업들이 부채 상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흥국들의 추가 돈 풀기로 이어져 '디커플링→신흥국 경기침체→신흥국 추가 경기부양→디커플링 심화'라는 악순환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미국과 비미국 간 금리격차가 커지는 '디버전스'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ECB의 부양책에 대한 실효성에도 의문이 일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경기부양을 위해서는 금리 인하가 양적완화보다 효과적이지만 현재 마이너스(-)인 예치금리를 더 내리게 되면 금융기관과 개인의 현금 보유 성향이 커져 오히려 시장에 유동성이 부족하게 되는 '유동성 함정'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CB가 금리 인하와 양적완화를 통해 시장에 방출한 현금이 소비나 투자로 연결되지 않고 금고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알베르토 갈로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 거시경제 리서치 부문장은 "추가 부양책은 유로화의 가치를 낮춰 수출을 촉진하는 데는 다소 효과가 있겠지만 투자와 대출을 늘리는 효과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능현기자 nhkimch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