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무거운 새는 멀리 날 수 없다

GE 등 '디지털 기업' 환골탈태… 한국 기업들은 강 건너 불구경만



최근 선보인 GE의 이미지광고에는 대학에서 소프트웨어를 전공한 오웬이라는 신입사원이 등장한다. 그가 가족들에게 GE에 입사했다는 낭보를 전하자 아버지는 공장에서 사용하라며 할아버지의 낡은 망치를 건네줬다. GE하면 으레 제조업체로 알고 있던 것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다. 광고는 'GE가 디지털 기업이자 동시에 제조업체'라는 자막으로 막을 내린다. 요즘 GE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바로 전통 제조업과 정보기술(IT)을 결합한 '산업 인터넷(Industrial Internet)'이다. 한때 금융업에 진출했던 GE는 이제 군살을 빼고 본업인 제조업체로 복귀해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 11일 일본 열도는 항공기 한 대로 들썩였다. 바로 미쓰비시가 개발한 일본 최초의 제트 항공기 'MRJ(Mitsubishi Regional Jet)' 때문이었다. 동체 길이 35m에 최대 3,400㎞를 날 수 있다는 MRJ가 시험비행에 성공하자 일본 제조업계는 항공산업의 자존심을 되찾았다며 환호했다. MRJ는 미쓰비시가 백화점식 사업구조를 정리하고 항공산업에 집중하면서 일궈낸 최초의 값진 성과였다. 지난해 히타치와 화력발전 합작사까지 출범시킨 미쓰비시는 눈물겨운 구조조정 덕택에 만년 정체의 늪에서 벗어나 화려한 부활에 성공했다.

미국이나 일본 등 글로벌 기업들은 일찍이 문어발식 확장을 자제하고 1등 사업에만 집중하는 사업 재편을 통해 본격적인 수익 창출에 나서고 있다. 올해 세계 인수·합병(M&A)시장이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한 것도 이런 치열한 생존경쟁을 반영하고 있다. 바로 글로벌 기업들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다. 국내 기업들도 뒤늦게나마 빅딜과 사업 재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삼성과 한화, 롯데그룹의 계열사 양수도나 SK와 CJ의 유선방송사업 등이 대표적인 예다. 세계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새로운 생존방식을 이제 절감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아직도 사업구조 조정이나 회사 매각에 매우 소극적인 편이다. 빅딜도 대부분 10대 그룹에서만 이뤄졌을 뿐 다른 기업들은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분위기다. 한 중견기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얼마 전 회장에게 애써 마련한 구조조정안을 제출했다가 퇴짜를 맞고 말았다고 한다. 회장은 30년간 키워온 사업 부문을 왜 내다 팔아야 하느냐며 역정까지 냈다고 했다. 벤처기업들도 외부에서 인수 제안이라도 받을라치면 질겁을 하기 마련이다. 외부 변화에 둔감할 뿐더러 기업을 소유개념으로 인식하다 보니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작금의 기업 구조조정은 좋고 싫음의 차원에서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 제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자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큰 흐름이다. 일본항공(JAL)의 구조조정을 주도했던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소선(小善)은 대악(大惡)과 닮아 있고 대선(大善)은 비정(非情)과 닮아 있다'고 강조했다. 누구라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숱한 진통을 겪게 되지만 파산이라는 극한 상황에 비하면 훨씬 낫다는 얘기다.

흔히 우리 산업계가 조로(早老)했다는 지적을 많이 제기한다. 코스닥시장의 이익 상위종목을 훑어봐도 대기업 계열사이거나 아니면 대기업에 안정적으로 납품하는 기업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그만큼 산업계의 신진대사가 활발하지 못하고 젊은 기업들이 새로운 주역으로 쉽게 나서지 못하는 분위기다. 기업들도 이제 자발적인 사업 재편을 통해 제조업의 활력을 되찾아야 한다. 정부도 기업의 구조조정에 개입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걸림돌을 없애주는 등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GE만 해도 미국 정부에서 금융업을 키우라고 강권했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일본은 물론 중국마저 대규모 사업재편에 나서는 상황에서 우리만 외톨이로 남아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예로부터 무거운 새는 멀리 날 수 없고 나무도 낙엽을 버려야 새순이 돋는다고 했다. 성장절벽에 직면한 우리 기업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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