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에 저유가까지… 해외상황 긴박, 컨틴전시플랜 2개 짜놓고 일해요"

"매일 아침 눈뜨면 유가 먼저 살피는게 일
이런 판에 법인세 인상 얘기 나오니 답답"



IMF이후 가장 어려운데 정치권은 현장 너무 몰라

中·日 가격 후려치기에 내년 '판매절벽' 우려도

"매일 아침 눈뜨면 유가 먼저 살피는게 일

이런 판에 법인세 인상 얘기 나오니 답답"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스마트폰으로 유가부터 확인합니다. 러시아나 브라질 같은 국가는 유가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4대 그룹 임원 A씨의 최근 일과다. 자신이 담당하는 신흥국의 제품 판매와 유가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36달러선까지 떨어졌고 20달러대로 폭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통화가치 하락으로 직격탄을 맞았는데 유가까지 터져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라고 그는 푸념했다.

또 다른 4대 그룹 임원 B씨도 요새 잠을 설친다. 유가와 글로벌 경기침체, 이슬람국가(IS) 테러 같은 해외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는 "해외 사정이 하도 긴박하게 바뀌다 보니 위기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컨틴전시플랜을 2개 짜고 일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들 얘기는 2015년 12월 대한민국 기업의 현주소다. "남들은 연말에 승진해서 좋겠다고 하지만 경영상황을 생각하면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CEO급 인사)"이라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경제신문이 13일 삼성과 현대자동차·SK·LG 등 4대 그룹 주요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현장 임원 8명을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 수준 정도가 아니라 주요 기업이 흥망성쇠의 기로에 서 있다는 평가가 많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기업 현장을 너무 모른다"는 불만이 컸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는 공급과잉이다. 전 세계적 경기침체에 중국과 일본 업체의 공세가 치열하다. C그룹의 전략담당 임원은 "공급과잉이 심해 가격이 너무 내려가는데 주요 납품처도 빼앗겼다"며 "경쟁사에서 가격을 계속 후려치고 있어 팔아도 이익이 나지 않을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신규 투자를 집행하려 해도 과거처럼 시장이 성장한다는 확신이 없다"며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이런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매출감소도 현실이다. 비용감축 체제로 들어서 마케팅으로 판매를 늘리기도 어렵다. 일부 그룹은 해외거점 조정, 법인폐쇄 같은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하고 있다. 4대 그룹 계열사의 D사장은 "내년에는 비용 때문에 인센티브(판매 장려금)를 더 지속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며 "'판매절벽'까지 생기지 않을까 겁이 난다"고 말했다.

우리 기업들의 위기감이 수출 주력 사업이자 올 한해 가장 돈을 많이 번 분야 중 하나인 반도체에까지 드리워져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중국이 메모리와 플래시 분야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공개 천명한 데 이어 반도체에서의 양안(중국+대만) 합작 가능성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4대 그룹 임원인 E씨는 "대규모 시장을 가진 중국이 너네(SK하이닉스 등)가 우리와 협력하지 않으면 다른 애들과 하겠다는 식으로 무력시위를 한다고 생각한다"며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과 대만이 손을 잡으면 기술격차가 급격하게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국내 정치는 변한 것이 없다는 게 현장 임원들의 생각이다. 되레 제조업 위기를 안이하게 생각하면서 정쟁에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은 비용을 줄이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노동생산성도 그래서 올려야 하는 것인데 국회에서 저렇게 발목을 잡고 있으니 현장 분위기를 모른다고 봐야 합니다." 4대 그룹 CEO급 인사 F씨의 직언이다. 당초 기업이 생각했던 것보다 낮은 수준에서 노동법 개정안이 만들어졌는데도 야당의 반대로 처리가 안 되는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대기업의 사업재편 지원을 위한 '원샷법'도 마찬가지다. 적기에 지원방안이 나와야 하는 법안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발목잡기로 정기국회 처리가 무산됐다. G씨는 "정부의 수정안을 보면 경영권 승계로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후 적발 시 승인을 취소하도록 돼 있고 심의위원회에도 국회 추천인물을 넣는 등 몇 개의 안전장치를 해놓았더라"며 "그런데도 '원샷법'을 마치 대기업 퍼주기용 법안인 양 매도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국회를 보면 한숨밖에 안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원샷법은 이것저것 후퇴한 게 많고 일본에 비해서도 수준이 낮아 상당수 기업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며 "일부 야당 정치인의 경우 제조업 위기를 안이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같은 맥락에서 기업의 위기를 엄살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다는 말도 있다. C그룹 임원도 "일본을 포함한 주요국들은 법인세를 내린다 하고 미국도 투자기업에 각종 혜택을 제공한다"며 "우리는 거꾸로 법인세를 인상하자는 얘기가 나오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일부 업체는 노사 문제를 걱정하기도 했다. H씨는 "내년 가장 큰 문제가 노사"라며 "파업을 포함해 노사갈등이 생기면 생산차질을 비롯해 판매에 악영향을 미친다. 내년을 무겁게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점이 가장 큰 고민"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소비진작책을 유지해줬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D씨는 "올해는 개별소비세 인하 같은 정부 지원책이 효과가 있었고 이 덕에 판매량이 늘어 손실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며 "개소세 인하 혜택을 연장해주거나 별도의 내수진작책을 정책적으로 고려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C그룹 임원도 "우리나라는 치열한 기업 현장을 정치권이 너무 모른다"며 "법인세 부분을 비롯해 가능한 정책적인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영필·강도원·이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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