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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도 기술력도 없던 시절, 불굴의 의지로 돌파
복지재단·글로벌 기업 등에 아직도 '아산의 향기'
제2·제3의 정주영 나올수 있는 사회 만들어 가야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 아산 정주영 회장은 그렇게 사회사업을 시작했다.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정 회장은 우리 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매진했다. 지금 남아 있는 아산병원은 정 회장의 작품이다. 1977년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세운 그는 의료시설이 부족한 농어촌 지역에 먼저 병원을 세웠다. "의료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최신식 병원을 지어줘야 한다"는 게 정 회장의 뜻이었다. 소탈했던, 너무나 서민적인 '왕회장'의 생각 그대로다. 서울 강남과 부자 지역 위주로 돈이 되는 곳에만 병원을 짓는 지금과는 180도 달랐다.
아산은 전남 보성을 시작으로 정읍·영덕·강릉 등에 200병상·300병상 규모의 최신 병원을 지었다. 현재 서울아산병원은 상대적으로 늦은 1989년 개원했다. 전 국민이 이용하는 아산병원, 그곳에는 서민과 근로자를 아끼고 사회발전을 바라는 아산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는 셈이다.
아산병원뿐만이 아니다. 아산은 우리 사회 곳곳에 살아 있다. "정 회장의 어록과 에피소드는 흘러간 얘기가 아니라 살아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는 김문현 현대중공업 자문역의 말처럼 아산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의 철학은 남아 우리에게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지난 18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산 추모 음악회나 24일 있었던 '아산 탄신 100주년 기념식'이 아니더라도 그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실제 아산은 우리 가까이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만 해도 의료사업 외에 장애인과 아동, 노인, 여성복지, 북한 및 해외재난 지원 같은 사업을 하고 있다. 1977년부터 지난해까지 37년간 4,124개 단체가 782억원을 지원 받았다. 인문·사회·공학·이학·의학 분야 학술연구 지원도 꾸준하다. 1977년 이래 2013년까지 2,319과제에 184억원의 지원금이 나갔다. 사회봉사나 의료봉사를 한 이들에게 시상하는 아산상과 아산의학상도 사회의 등불이 되는 이들을 계속 격려하고 있다. 정 회장이 애착을 가졌던 서산농장에서도 쌀은 계속 나온다.
무엇보다 아산의 향기는 그가 남긴 글로벌 기업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싸구려 일회용 자동차"라는 평가를 듣던 현대차는 메르세데스벤츠나 BMW와 견줘도 손색이 없는 '제네시스 EQ900'이라는 최고급 차량을 제작하는 회사가 됐다.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는 10월 말 기준 수주잔량이 111척(528만CGT)으로 대우조선해양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랐다. 현대건설과 현대백화점, 현대그룹 등 아산이 남긴 기업들만 해도 수두룩하다. 더 넓게 보면 KCC·한라·현대산업개발 등도 아산이 씨를 뿌렸다.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현대, 현대백화점만 합쳐도 자산규모가 276조원에 달한다.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그런 아산의 정신을 발전 계승시키는 것이라고 재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그중에서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도전과 창조정신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임상혁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의 진단. "아산이 계실 때 우리나라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본도 없고 기술력도 없고 교역조건도 형편없었지요. 그러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해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자본도 충분하고 기술력은 세계 수준에 올랐고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통해 교역조건도 좋습니다. 그런데 기업가 정신도 낮고 우리 국민도 더 잘 해보자는 생각, 즉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아산에게서 배울 것은 바로 이 같은 부분이에요. 아산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 한 번 경제도약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그가 생전에 못 푼 일들도 우리의 몫이다. 남북통일과 정치수준 개선, 서민경제 개선이 그것이다.
지금은 북한땅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태어난 아산은 '통일소'를 몰고 방북했을 정도로 남북통일과 관계개선에 큰 힘을 쏟았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남북통일과 그에 따른 대한민국의 비상은 우리 세대가 짊어져야 할 숙제다.
아산이 실패했던 정치개혁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산이 정치에 뛰어든 진짜 속내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정치로는 안 되고 민생경제를 더 챙겨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선거 때면 반복된다. 아산이 주장했던 반값 아파트처럼 서민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시대는 올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제2·제3의 정주영이 탄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도 주요한 과제다. 2000년 이후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동한 업체는 100만개 가운데 7개 정도다. 우리 사회가 경영인 '불임시대'를 만든 것은 아닌지 곱씹어볼 때다.
25일은 아산 탄생 100주년이다. 우리는 듣고 싶다. 제2·제3 정주영의 "해보기나 해봤어?"를.
/김영필기자 susopa@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