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타는 영화&경제] (9)‘브이 포 벤데타’와 어나니머스

통행금지 시간 집밖을 나선 이비(나탈리 포트만)는 후미진 골목에서 험상궂은 사내들에게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한다. 사내들은 다름 아닌 국가순찰대원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할 공직자가 어린 소녀를 강제추행하려 한 것이다. 이 때 가면을 쓰고 나타난 사나이 브이(휴고 위빙)가 현란한 칼 던지기 솜씨를 뽐내며 이비를 구한다. 부당한 국가권력의 억압에 대한 불복종을 주제로 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첫 장면이다. 브이는 이비에게 말한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선 안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지.”

주인공 이비가 외출을 위해 머리를 만지고 있다. /출처=네이버영화


#언론과 사상까지 철저히 통제된 사회

영화 배경은 2040년 제3차 세계대전 이후 지독한 통제사회로 변모한 영국. 정치적 성향은 물론, 성적 취향만 달라도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기 다반사다. 거리 곳곳엔 카메라와 녹음 장치가 설치돼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 대상이고, 들을 수 있는 음악과 읽을 수 있는 책은 제한돼 있다. 예술작품의 선택권까지 정부가 독점하며 언론조차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세상은 평온하다. 그 어떤 의문도 반론도 존재하지 않으니 정치적 불복종도 있을 리 없다.

그러던 중 브이가 방송국을 점령해 메시지를 전한다. “진실이란... 이 나라가 단단히 잘못됐단 겁니다. 잔학함, 부정, 편협함, 탄압이 만연하고 한 때는 자유로운 비판과 사고, 의사 표현이 가능했지만 이제 온갖 감시 속에 침목을 강요당하죠. 어쩌다 이렇게 됐죠? 누구의 잘못입니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고 대가를 치르겠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건 바로 여러분입니다.”

브이가 쓴 가면의 주인공 ‘가이 포크스’는 1605년 반역사건을 일으킨 실존인물이다. /출처=네이버영화


#‘가이 포크스’는 불복종과 저항의 상징

영화에서 브이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온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의 제임스 1세 정부의 독재에 맞서 의회를 폭파시키려다 처형된 실존 인물. 이후 그는 영국에선 실패한 반역자의 본보기였지만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선 불복종과 저항의 상징으로 400년이 넘도록 기념돼 왔다.

브이와 똑같은 가면을 쓰는 국제 해커집단 어나니머스(anonymous)가 요즘 화제다. 파리 테러를 자행한 IS(이슬람국가)에 선전포고한 뒤 IS와 관련된 5,500여개 SNS 계정을 폐쇄해 박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올해 초에도 IS를 바이러스라고 규정하며 관련 계정을 해킹했다.


브이(오른쪽)가 강제추행을 당할 뻔한 이비를 구했다. /출처=네이버영화


#‘가이 포크스’ 가면 쓴 어나니머스 맹활약

흔히들 어나니머스를 ‘착한 해커’라고 한다. 컴퓨터 해킹을 투쟁수단으로 삼아 저작권 독점 반대, 반독재체제 지원, 소아성애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면서 2012년엔 타임지에서 선정한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2013년 ‘김정은 사임’ ‘핵무기 포기’ 등 4개 요구사항을 앞세운 북한에 대한 반체제 운동은 국내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었다. 이 밖에도 2013년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 대책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아베 정부를 공격한 일을 비롯해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를 돕고 백인 우월주의 ‘쿠 클럭스 클랜(KKK)’에 타격을 가한 활동은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확보했다.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 브이는 불의에 맞서는 혁명가이자 의적(義賊)이지만 그 속에 ‘복수의 칼날’이 숨어있다. 독재의 상징인 의사당을 폭파시켜 숭고한 ‘선(善)’을 달성하겠다는 열의에 가득 찬 속에서도 그동안 자신에게 고통을 줬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적이고 냉혹한 복수를 감행하는 분열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비 역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은 연기를 위해 삭발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출처=네이버영화


#어나니머스, 착하기만 한 해커인가

어나니머스 또한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는 사회나 국가 등 특정 대상에 대해 사적(私的)으로 응징에 나선다는 측면에서 영화 속 브이와 유사하다. “기업의 이익보다 개인이 정보를 서로 공유할 권리가 우선한다”고 선언한 어나니머스는 저작권 관련 단체들을 마구잡이로 해킹해왔다. 2010년엔 자신들이 지지하는 위키리크스를 괴롭힌다는 이유로 마스터카드·비자카드에 대해 디도스 공격을 가했다. 심지어 작년엔 소니·마이크로소프트·월마트 등 기업이 보유한 개인정보를 재미 삼아 유출했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불의에 대한 반감은 정당하지만 사적인 응징까지 절대적인 선(善)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 다만 부조리한 현실이 시민의 분노를 키우고, 그 탓에 불의에 대한 사적 응징이 영웅시 된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영화 속 독재자는 “대장부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며 브이를 비난했다. /출처=네이버영화


#영화 속 독재자 국민 상대로 ‘공갈전략’

그런데도 영화 속 독재자는 거짓과 탄압을 멈추지 않는다. “국민들에게 우리가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라”며 테러와 재난, 전염병 등에 대한 뉴스를 계속 쏟아내게 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전형적 ‘공갈전략’이다. 상대를 기만해 자신의 약점을 감춤으로써 판세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어가는 속임수다. 한국 정치인들이 입으로만 “국민을 위해”라면서 제 잇속만 채우는 행태 또한 공갈전략에 속한다.

새누리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집회·시위에서 복면 착용을 금지하는 ‘복면 금지법’을 입법화할 태세다. 국민으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 독재자는 “대장부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고 욕했다. 하지만 “마스크는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국민을 탄압하는 사악한 벌레들을 멸할 도구”라는 브이의 주장에 솔깃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문성진기자 hnsj@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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