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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만큼은 악다구니 같은 여야의 정쟁도 서로를 물고 뜯는 계파 간 갈등도 없었다. 고인이 남긴 '화합과 통합'의 메시지를 실천하듯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떠나 보내며 슬피 애도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국가장으로 치러진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광장에서 7,000명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진행됐다.
오후1시50분께 조악대의 조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 전 대통령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영결식장에 서서히 들어섰다. 미리 도열해 있던 군 의장대는 '받들어 총'으로 예를 표했다.
최다선(9선)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은 살아생전 "가장 어둡고 괴로운 순간에도 국회에 대한 애정을 버린 적이 없다"고 강조할 만큼 진정한 '의회주의자'였다.
그런 그의 마지막 등원(登院)길을 함께하기 위해 한평생 고락을 함께한 반려자 손명순 여사가 차남 현철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입장했다.
영결식장 맨 앞자리에는 유족들 외에 이명박 전 대통령 내외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 장례위원장인 황교안 국무총리, 정의화 국회의장을 비롯한 3부 요인, 외교사절과 각국 대사 등도 함께 자리했다.
그 좌측으로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 등 정당 대표들이 착석해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김동건 전 KBS 아나운서의 사회로 오후2시부터 시작된 영결식은 △국기에 대한 경례 △묵념 △약력 보고(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 △조사(황교안 국무총리)·추도사(김수한 전 국회의장) 낭독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황교안 총리가 조사 말미 "누구보다 애통한 마음으로 대통령님을 보내시는 손명순 여사님과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고 하자 손 여사는 지난날 남편과 함께했던 기억을 되살려내려는 듯 지긋이 눈을 감았다.
조사·추도사 낭독에 이어 기독교·불교·천주교·원불교 등 4개 종단의 종교의식이 거행된 후 제단 양 옆에 마련된 대형 전광판을 통해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가열 찬 민주화 투쟁에 이은 대통령 당선,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 등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담은 영상이 약 7분간 상영됐다.
이 영상에서 "날 감금할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 빼앗지는 못해"라는 김 전 대통령의 육성이 흘러나오는 대목에서는 유족은 물론 시민 조문객들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열했다.
체감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이날 영결식이 진행될수록 눈보라가 거세지면서 쓸쓸한 비애감을 더했다. 흩날리는 눈발 때문에 현철씨가 손 여사에게 "괜찮으시냐"고 물어보며 담요를 치켜 올려주는 모습도 보였다.
영상 상영이 끝나고 헌화와 분향이 시작됐고 가장 먼저 손 여사가 국화꽃 한 송이를 영정 앞에 올려놓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손 여사의 옆에 선 현철씨는 영결식이 시작된 직후부터 연신 눈물을 훔친 탓에 이미 시뻘겋게 눈이 충혈된 모습이었다.
이어진 추모공연에서는 바리톤 최현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고인이 생전에 애창했던 '청산에 살리라'를 불렀다. 3군 조총대의 조총 발사를 끝으로 사회자가 "이제는 김 전 대통령을 보내 드려야 할 시간"이라며 폐회를 알렸다.
폐회 선언에 맞춰 오후3시20분께 영결식 제단 앞으로 들어온 운구차는 유족들과 함께 국회를 빠져나갔다. 국회 안팎에서 약 1시간 20분 동안 강추위 속에서 자리를 지켰던 시민들도 김 전 대통령을 눈물로 떠나보냈다.
이날 추도사를 낭독한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영결식 후 기자들과 만나 "정치권이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로 승화시키는 것이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며 "거산은 가셨지만 그 뜻은 앞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윤석·박형윤기자 nagija@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