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선친인 포우 김홍량의 고향은 황해도 안악이다. 지난 1907년 아버지는 안악에 양산학교를 설립하고 최광옥, 백범 김구 등 교육 선각자와 애국지사들을 초빙해 교육 구국운동을 확산시켰다. 양산학교는 당시 안창호의 대성학교, 이승훈의 오산학교와 함께 서북 지방의 항일운동·신문화운동, 그리고 교육 구국운동의 메카로 부상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7년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가 조직됐다. 신민회는 애국지사 800여명으로 결성됐는데 안악에서는 김구 선생과 아버지가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민회와 양산학교를 중심으로 한 항일투쟁의 맥은 1911년 끊어지고 만다. 1910년 11월 안명근을 중심으로 안악 일대의 애국지사들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된 '안명근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1911년 이 사건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조작하고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신민회 회원을 비롯한 민족지도자 105명을 기소했다. 이 사건을 '105인사건' 또는 '안악사건'이라고도 한다.
안악사건 판결문에서는 안명근에게 무기징역, 아버지와 백범 등 5명에게는 15년 형을 언도했으며 판결 이유는 대부분 날조된 것이었다. 백범과 함께 아버지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공중에 매달려 맞을 때 오른손에 힘을 주게 돼 아버지는 오른손이 왼손보다 10㎝ 이상 길게 됐다. 5년 이상 실형을 마치고 출옥한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지원, 백범 등 해외 망명 애국지사들의 가족 돌보기 등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했다. 정부도 이 같은 공로를 인정했다. 1977년 박정희 정부는 아버지를 독립운동 유공자로 포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2011년 이명박 정부는 아버지의 서훈을 취소하는 우를 범했다.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등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기재된 포우의 일본 찬양연설, 일본군 전투기 구입을 위한 기부금 헌납 기사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혹독한 일제 식민통치에서 기부금이나 축사가 강요되고 북한보다 더 심한 공포 정치에서 감히 이를 거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확인이 어려운 조선총독부 기관지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작은 허물로 아버지의 나라 사랑 정신 전부를 부정하는 정부의 조치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친일파라면 친일파가 지원한 애국운동은 친일운동인가. 자기 돈으로 애국한 자는 친일이고 남의 돈으로 애국한 자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은 누가 어떤 시비를 걸든 엄연한 사실임에도 아버지의 업적에 대한 돌팔매질을 방관해야만 하는 필자는 "아버님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