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4일 아침 6시30분. 대학생 300여명이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의 담을 넘어 들어와 외교관과 가족 53명을 인질로 잡고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팔레비를 송환하라!’
이란 국민들은 여기에 열띤 호응을 보였다. 1953년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각본 아래 진행된 쿠데타로 집권한 팔레비 전 국왕이 회교혁명으로 추방당하기까지 26년간 막대한 자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5만명의 국민을 살해한 죄를 묻겠다는 대학생들의 명분에 이란 국민들은 똘똘 뭉쳤다.
미국은 지병인 췌장암 치료차 뉴욕을 방문한 팔레비 전 국왕의 송환을 거부하고 항공모함 전단을 페르시아 해역에 보냈다. 이란은 끄떡하지 않았다. 팔레비 왕정을 붕괴시키고 회교혁명을 이룬 이란의 회교 지도자 호메이니옹은 협상파인 바자르간 총리를 해임하고 미국과 관계를 끊었다.
인질이 석방된 것은 1981년 1월 말.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식 직전에야 풀려났다. 인질이 억류된 444일 동안 미국은 뭘 했을까.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1980년 4월에는 ‘독수리 발톱 작전’으로 명명된 인질 구출작전에 특공대를 투입했으나 사막 지역에 비상대기하던 헬리콥터와 수송기의 엔진에 모래가 끼는 통에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인질사태 장기화는 세계 경제에 충격을 안겼다. 먼저 금(金) 가격과 금리가 요동쳤다. 사태 직후 미국이 뉴욕 연방준비은행 지하창고에 예탁된 이란의 금 비축액을 동결하자 품귀현상이 일었다. 마침 미국 경기가 바닥을 기던 시절, 금은 안전자산으로 선호되며 온스당 430달러에 형성되던 가격이 단숨에 850달러로 치솟았다. 요즘에는 1,000 달러선 붕괴를 앞두고 있다지만 당시에 기록한 금값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2,500달러 이상으로 ‘역사상 최고(historical high)’ 라는 기록을 지금껏 이어가고 있다.
이란 대사관 인질사건은 정치는 물론 경제학의 흐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미 카터가 재선에 실패한 미국 대통령 자리에 ‘강력한 미국’을 주창한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가 올랐다. 카터의 퇴진과 함께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경제를 지배하던 케인스 경제학 시대는 막을 내리고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렸다.
역사는 돌고 도는가. 이란 인질사태로부터 36년째를 맞은 오늘날 세계 경제학의 주류 자리에 신자유주의가 밀려나고 케인지언이 다시 득세하는 분위기다. 냉랭했던 미국과 이란의 관계도 지난해부터 풀리기 시작해 요즘은 세계가 국제경제 무대에 복귀하는 이란을 주목하고 있다. 지구촌에서 오직 한 곳, 한반도에서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긴장이 흐른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