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젤리제 거리, 오르세 미술관, 몽마르트 언덕.. 내가 알고 있는 파리는 아름다운 도시다. 사실 파리는 인위적인 도시지만 ‘있어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도시다. 커피 한 잔과 바게뜨의 여유가 있는 곳. 그러나 ‘파리가 걸어온 길’을 공부해 보면 ‘피의 역사’위에 서 있는 문화적 산물임을 알게 된다.
19세기 무렵 나폴레옹 3세는 음험하고 어두운 중세 시대의 흔적이 700년 넘게 남아 있는 파리를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 Eugene Hausmann)을 파리 시장으로 기용해 대대적인 재건 계획을 단행했다. 나폴레옹 3세는 가난한 프랑스가 전 유럽에 자신만만하게 설 수 있는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아픈 역사의 상흔도 지우고 싶어 했다. 파리에는 지난날 신을 믿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살해했던 성 바르톨로뮤의 학살(1572), 프랑스 혁명(1789-1795)과 같은 역사가 곳곳에 서려 있었다. 파리 사람들은 17세기까지 종교적 다양성을 위한 힘겨운 투쟁을 했고, 18세기까지는 인권을 위해 구세력과, 그리고 전 유럽과 맞서 싸우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 유명한 단두대의 광풍도 파리에서 처음 생겨났다.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세력과 반동세력을 나누던 광기의 역사였다. 자유를 위한 혁명이 내부에서 모순을 일으키자 공화정의 총아 나폴레옹이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에 올랐다. 파리는 항상 다양성(diversity)의 이름이자 그것을 제압하고 힘의 기반을 만들고자 했던 정치의 폐쇄성이 꿈틀대는 장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적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날 전세계 대중이 예술과 자유로움이 깃들여 있는 파리를 음미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상주의 미술도 다양성을 억압하던 어떤 제도의 붕괴로부터 시작됐다. 루이 13세 때부터 유지되던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emie Francaise)가 문을 닫자, 곳곳에서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같은 사람이 나타났고 고흐, 고갱 등의 후배 세대가 그 기풍을 이어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쇼팽, 리스트 같이 프랑스 밖의 음악 천재들이 파리에 모여 아름다운 곡을 쓰고, 살롱과 카페의 문화를 살찌웠다. 전 유럽을 상대로 자유를 위해 싸우던 파리는, 19세기 중반부터 전 유럽이 사랑하는 개방 도시가 됐다. 나치 독재자 히틀러가 파리를 점령하고 싶었던 이유가 꼭 1차 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게 열패감을 안겼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있다. 히틀러는 인종 다양성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다양성과 자유가 넘치는 파리는 자신의 정치사상 기반을 붕괴시킬 위험이 있는 ‘적의 진지’였다. 그러나 파리 시민은 ‘레지스탕스’로 그에게 대항하며 자유 프랑스의 정신을 무너뜨리려는 모든 시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했다.
지난 13일 129명의 생명을 앗아간 IS의 파리 테러를 프랑스 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현지에 유학하고 있는 친구가 어느 교수의 특별기고문을 이야기해줬다. ‘자유, 평등, 박애 중 어느 것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과 싸워야만 한다.’ 시리아에서 유입된 테러리스트들은 파리의 자유로운 기풍을 역이용해 도시에 잠입했고, 그들이 혐오하는 거대 서양 문명의 상징이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살육을 저질렀다. 프랑스군이 IS의 중심지 락까를 향해 다시 공습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단순히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다. 프랑스가 목숨을 바쳐 지켜왔던 다양성과 창의성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의(義)의 싸움이 되어야만 한다. 이번 테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명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용기있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다. ‘자유 프랑스 만세!’
#PrayForParis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