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통계학 지평 연 윌리엄 페티


‘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 농업보다는 제조업이, 제조업보다는 상업(서비스업)이 더 높은 수익을 낸다는 부등식이다. 최초로 주장한 인물은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 현대 통계학, 빅데이터의 시초로 꼽히는 정치산술(Political Arithmetic· 1690, 사후 출간)을 통해서다.

페티의 저술 목적은 국가간 우열 비교. 네덜란드가 가장 잘사는 원인을 농업보다도 제조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노동력이 많기 때문이라고 봤다. 페티의 관찰은 250년이 흐른 1940년 영국의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Colin Clark)에 의해 더욱 가다듬어졌다. 경제 발전에 따라 노동인구와 소득의 비중이 제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다시 3차 산업으로 이동한다는 이론은 ‘페티-클라크 법칙’이라는 이름이 붙어 시대를 풍미했다.

‘노동은 부의 아버지, 토지는 부의 어머니’라는 명언을 남긴 윌리엄 페티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삶을 살았다. 가난한 의류업자의 아들로 1623년 태어난 그의 출발점은 견습 선원. 다리가 부러져 프랑스에 머물 때 낙담에서 벗어나 라틴어와 외국어를 익혔다. 귀국 후 잠시 해군사관생도로 지내다 찾은 네덜란드에서는 토마스 홉스(리바이어던의 저자)의 개인비서를 지내며 르네 데카르트와도 교분을 쌓았다.


영국에 돌아와 옥스퍼드에서 의학을 공부할 때는 돈에 시달렸다. 3주간 호두만 먹고 산 적도 있었지만 1649년에는 의학박사 학위를 따내고 옥스퍼드대학 해부학 교수로 재직할 때는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교수형을 당해 사망진단을 받은 여인을 살려낸 적도 있다. 경제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아일랜드 원정. 크롬웰 군대의 수석군의관으로 1652년 아일랜드에 파견된 그는 몰수할 토지의 가치를 평가하며 통계를 몸에 익혔다.

가난에 시달렸던 페티는 직위와 재능을 이용해 뒷돈도 챙겼다. 아일랜드 토지 측량시 빈 땅을 찾아내 연간 지대수입 9,000파운드(요즘 가치 약 18억원)를 내는 땅도 얻었다. 이중바닥 선체를 지닌 선박을 발명하고 철공소와 광산을 운영하며 어업과 목재업까지 손을 댄 왕성한 사업의욕도 재력에서 나왔다.

크롬웰 인맥이면서도 왕정복고 후 찰스 2세의 총애를 받으며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고 기사작위를 받은 데도 돈의 힘이 작용했다. 재산은 집안까지 명문가로 만들었다. 1782년 영국 총리에 올라 사실상 영국의 패전으로 끝난 미국 독립전쟁의 뒷수습을 맡았던 윌리엄 페티 피츠모리스가 그의 증손자다.

페티는 부정하게 쌓은 막대한 부를 남기고 1687년 12월 16일 64세로 사망했지만 그의 이름은 경제사에 빛난다. 존 로크, 더들리 노스 등과 더불어 아담 스미스 등장 이전에 영국 경제학의 여명을 개척한 경제학자로 손꼽힌다. 대표 저술인 ‘정치산술’은 형이상학적ㆍ주관적 판단 대신 숫자와 중량ㆍ척도를 바탕으로 제반 현상을 고찰했다는 점에서 경제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마저 혹평했던 마르크스가 ‘근대 경제학의 건설자, 가장 천재적이고 독창적인 학자’라고 추켜세웠다는 페티가 남긴 유산도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확고한 믿음으로 내려온 페티-클라크 법칙은 앨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1980) 이후 가속화한 탈공업화 현상 속에서 설득력을 상실하더니 최근에는 서비스업의 자동화·무인화로 ‘역 페티-클라크 법칙’이 현실화하는 시대다. 누가 말했던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혹여 희미하게나마 시간을 이어가는 게 있다면 인간의 모진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아일랜드에서 페티는 아직도 ‘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니까./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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