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때부터 식생활 서구화에 주목… 무일푼서 돈 빌려 개원
24시간 진료로 명성… 전문병원까지 세웠지만 금융위기 직격탄
통증 적은 새 치료법으로 재도약해 수술규모 국내 4위로 우뚝
국내 굴지의 대장항문 전문병원인 양병원의 양형규(64·사진) 원장은 프로바둑 기사 조치훈 9단의 좌우명인 '목숨 걸고 바둑을 둔다'는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업무에 임한다. 양 원장의 좌우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항상 '목숨 걸고 병원을 운영한다'는 각오로 환자를 진료한다고 말한다.
양 원장이 이런 병원운영 철학을 갖게 된 데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다 병원을 키워오면서 부닥쳤던 수많은 난관과 이를 극복해나간 경험 등이 복합적으로 스며들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은 그의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자성어다. 특히 실패에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매번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데는 힘들었던 그의 어린 시절을 이겨낸 경험이 큰 힘이 됐다.
양 원장은 증권업에 종사했던 부친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가세가 기울면서 이사를 밥 먹듯이 다녔다. 집을 구할 돈이 없어 서울을 떠나 경기도 구리시로 이사를 온 가족이 월세 2,500원짜리 단칸방에 모여 살았던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수년 동안 신문 배달일도 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해 성적이 반에서 30등 이하로 떨어졌을 만큼 바닥을 쳤다"며 "대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고2 때부터 공부에 전념해 졸업할 때는 전교 3등까지 올랐다"고 말했다.
양 원장이 처음부터 의사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남을 가르치기 좋아했던 그는 당초 학교 선생을 꿈꿨다. 그러나 서울대 사범대학 물리학과에 낙방하면서 그 꿈이 바뀐다.
재수 시절 대학입시를 앞두고 이삿짐을 옮기다가 부상을 당해 허리디스크가 터지는 불운이 찾아왔다. 병원비가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던 그는 수소문 끝에 급기야 진료비가 저렴하고 어려운 환자들을 도와주는 복지 프로그램이 갖춰져 있는 필동성심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됐다. 의사로서의 꿈은 이곳에서 생긴다. 당시 저렴한 가격으로 수술을 받게 도와준 레지던트(전공의)로부터 의대 진학을 권유받고 연세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학원을 운영한 독특한 이력도 갖고 있다. 양 원장은 "의대에 진학한 후 대학 등록금과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개인 과외를 했다"며 "과외 받은 학생의 성적이 크게 오르면서 입소문이 나고 학생들이 몰리면서 개인 건물을 빌려 아예 과외학원을 차렸다"고 말했다. 셈이 빨랐던 그는 학원에서 수학과목을 담당하며 인기강사로 승승장구했다.
이처럼 잘나가던 학원도 군부가 권력을 잡고 있던 지난 1980년 7월30일 갑작스러운 과외 금지 조치가 내려지며 하루아침에 폐업을 당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듯한 좌절감을 맛본 그는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고 의사로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로 생각을 바꿨다. 잘나가던 학원 원장직을 내려놓고 본연의 역할인 의사로 돌아와 모교인 세브란스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다.
그는 "잘나간다 싶으면 늘 어려움이 닥쳤고 그때마다 새로운 도전을 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며 "지금의 대장항문 전문병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한 긍정의 자세로 끊임없는 도전을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가 수많은 질환 중에 하필 대장항문질환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양 원장은 "의대생 시절만 해도 대장항문질환이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향후 식생활이 서구화됨에 따라 치질과 대장암 등의 대장항문질환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생각했다"며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무일푼 상태여서 여기저기서 빌린 9,250만원으로 구리시에 대장항문 전문클리닉인 '양외과의원'을 개원했다"고 말했다. 그때가 1986년이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치질·대장암 등의 대장항문질환이 급증하며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건강보험공단 등의 통계에 따르면 치질은 백내장에 이어 한국인들이 매년 가장 많이 하는 수술질환 2위로 꼽힌다.
레지던트 때 두 달간 영남대병원에 파견근무를 하면서 치질 부위를 냉동시켜 수술하는 새로운 치질 치료법인 냉동치료요법을 처음으로 접한 것도 대장항문 전문병원을 개원하는 데 동기가 됐다. 전국의 대장항문질환 환자들이 이 병원에 몰려드는 것을 보고 그는 향후 대장항문질환 환자가 급증할 것이라고 판단해 전문병원 개원을 준비하게 됐다.
개원 후 2년간 밤낮없이 24시간 진료를 했다. 결혼식 당일에도 수술을 하고 나서 신혼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이 같은 열성 덕분에 4년 뒤인 1990년 5층짜리 건물로 병원을 확장 이전하는 성과를 올리고 6년 뒤인 1996년 남양주시 최초의 대장항문 전문병원인 양병원을 개원한다. 주변에서는 '아직 이르다'며 병원 개원을 말렸지만 그는 향후 가능성을 보고 과감히 병원 신축을 추진했다. 땅을 매입하고 병원 건물을 짓기까지 꼬박 4년이 걸렸다.
그는 "병원 개원을 준비하는 4년간 돈에 대한 고민과 가족·직원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많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개원에 대한 기쁨도 잠시, 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개원 1년 만에 금융위기가 터진 것이다. 환자는 줄었고 병원 경영은 어려워져 은행 대출로 근근이 유지해야만 했다. 그가 위기탈출의 돌파구로 생각해 낸 것이 다른 병원과의 차별화를 위한 새로운 치료법이었다. 그는 기존의 치질 수술법이 치질 부위 절제를 많이 해서 항문이 좁아지고 통증이 많다는 점에 착안, 이를 개선하는 새로운 치료법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양 원장만의 치질 치료법인 '거상 고정식 점막하 치핵절제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거상 고정식 점막하 치핵절제술은 항문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자 치핵 조직을 가능한 한 적게 절제하고 항문 밖으로 빠져나온 조직은 원래의 위치로 복원시켜 고정해주는 수술법이다. 항문 피부를 보존하고 치질 조직만 최소한으로 제거하는 '점막하 치질수술법'에 수술시 바깥쪽으로 탈출한 치핵 조직을 원래 위치에 복원시켜주는 '거상(lift-up)치료법'을 함께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거상 고정식 점막하 치핵절제술을 받게 되면 항문의 피부와 점막을 최대한 보존하므로 항문이 좁아지지 않고 통증이 적다"며 "항문쿠션조직을 최대한 보존해 항문이 좁아지는 항문협착을 방지해주는 장점도 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치료법이 입소문이 나면서 병원 경영은 빠르게 정상을 되찾았다. 남양주 양병원이 자리를 잡을 무렵인 2005년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또다시 도전에 나선다. 강동구 길동에 두 번째 병원인 서울 양병원을 개원한 것이다. 하지만 기반이 없었던 서울에서의 개원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서울 양병원 개원 첫해 2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지역주민을 위한 건강강좌 및 홍보 이벤트 등을 통해 3년 만에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수술 건수나 매출 규모 등을 고려했을 때 명실공히 국내 4위권 규모의 대장항문 병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2005년 개원 당시 760여건에 불과했던 수술 건수는 7여년 만에 3,100여건 이상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그는 양병원 성장의 밑거름으로 시기에 맞는 적절한 병원 확장 전략과 끊임없는 연구, 그리고 우수한 의료진을 꼽는다. 경기도에서 임대 의원으로 시작해 자신의 건물로 확장해 검증을 받은 뒤 서울 진출을 시도했다. 서울이 아닌 수도권에서 시작한 덕분에 초기비용과 위험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의료진에는 학회활동 참여를 의무화하고 연간 1건 이상의 논문 발표를 하게 하는 등 학술활동을 독려하고 있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의료진만이 환자 진료를 잘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병원 내에서 매달 2회의 정기적인 학술 컨퍼런스를 여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양병원은 2013년 중소병원으로는 이례적으로 '아시아·태평양 대장항문질환 컨퍼런스(APPC)'라는 굵직한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의사들을 초청해 대장항문질환에 대한 최신 의료기술을 교류하고 발표하는 자리였다. 글로벌화를 위한 양 원장의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그는 "향후 10년간의 도전은 바로 세계적인 대장항문 전문병원으로의 도약"이라며 "양병원을 영국의 세인트마크 병원,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 못지않은 세계적인 전문병원으로 만드는 게 마지막 도전이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건강·의학 전문서적 19권 집필… "글쓰기가 두번째 직업" '치핵' 등 세계적 출판사서 출간 양형규 원장은 의사라는 직업 말고도 또 하나의 천직이 있다. 바로 글 쓰는 일이다. 그는 병원 문을 연 후 지금까지 일반인을 위한 건강 단행본과 의사들을 위한 전문서적 등을 직접 쓰거나 번역, 출간해오고 있다. 진료와 수술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직접 쓰거나 번역한 책만 19권에 달한다. 그는 "책을 쓰거나 번역을 하면 그 자체로 많은 공부가 된다"며 "후배 의사들에게도 책을 많이 읽고 쓰길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 5월에는 그가 쓴 '치핵(Hemorrhoids)'이라는 책이 세계적인 의학·과학 전문 출판사인 스프링거를 통해 영문판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스프링거는 세계적인 의학·과학 전문 출판사로 노벨상 수상자 대다수가 저자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권위가 높다. 이 책은 지난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우수학술도서상으로 선정된 '치핵'의 영문판이다. 양 원장은 "이 책을 선물 받은 다른 나라 의사들의 권유로 영문판 출간을 결심하게 됐다"며 "조만간 중국어판으로도 번역, 출간될 예정이어서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글쓰기와 함께 양 원장이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사회공헌 활동이다. 그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 기반이 탄탄해졌다는 점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직접 실천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매년 병원 수익금의 일부를 지역 내 희망케어센터와 연계해 어려운 이웃들의 의료비로 지원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장학사업뿐 아니라 각종 문화·체육·예술단체 후원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한 무료 수술과 저소득층 위암과 대장암 환자의 의료비 지원도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 양 원장은 "어려움에 처한 청소년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적성을 개발해 우수한 인재로 커갈 수 있는 시스템을 위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노력해야 한다"며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이웃들이 관심을 갖고 희망을 주면 아무리 어려워도 용기를 잃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
●양형규 원장은 △1953년 충남 논산 △서울 성동고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연세대 보건대학원 고위자과정 수료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대한대장항문학회 제1부회장 △항문질환연구회 회장 △대한대장항문학회 상임이사 △대한병원협회 이사 △양병원 원장 |
/송대웅기자 sdw@sed.co.kr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