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두번 다시 못볼 美 채무 ‘0’


18조 9,221억 달러. 미국의 국가 채무 규모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매초 3만 1,558달러씩 늘어난다. 오는 2월 중순이면 19조 달러선 돌파가 확실하다. 세계 7~8위 수준의 군사력을 유지하는 한국의 연간 국방비 39조원도 미국의 국채 증가분 12일치 정도다. 올해 정부의 총예산(386.7조원)도 넉 달 증가분보다 적다.

오는 8월쯤에는 20조 달러를 넘을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국가 채무는 전 세계의 골칫거리다.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회복이 불투명한 이유도 근본적으로 미국의 막대한 채무에 있다. 과연 미국 부채를 갚을 수 있을까. 답은 글쎄다. 확언하기 어렵다. 능력도, 의지도 의심스럽다.

미국의 국가 채무가 ‘0(제로)’ 상태였던 시기는 역사상 딱 두 해(1835·1836년) 뿐이다. 1835년 1월 8일, 7대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국민들에게 자랑스레 선언했다. ‘대출이든 채권이든 빚을 다 갚아 미국은 채무에서 벗어났다’고.

건국 이래 처음인 ‘채무 제로(debt free)’ 상황은 미국을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다. 잭슨 대통령의 기쁨은 더욱 컸다. 부채 전액 상환을 발표한 1월 8일은 자신을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시킨 뉴올리언스 전투 승전 20주년 기념일이었으니까. (영미전쟁의 막바지인 1815년 1월 8일 변호사 출신인 잭슨이 이끄는 4,000여명의 미국 민병대가 영국 정규군 1만 명과 싸워 완벽한 승리를 거둔 뉴올리언스 전투는 건국 초기 미국의 분열을 막고 연방파의 입지를 강하게 만들어줬다)

몇 개월 전부터 부채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뉴올리언즈 전투 승전기념일에 억지로 맞추는 꼼수를 부렸지만 잭슨은 채무를 갚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잭슨의 첫 임기 시작 직전년도인 1828년 미국의 채무액이 8,110만 달러. 국내총생산(GDP)의 9.4%에 달하는 규모였다. 잭슨은 부채 청산을 위해 두 가지 정책을 구사했다. 긴축 재정과 국유지 불하.


철도와 운하 건설 같은 기간시설마저 주(州) 정부에게 떠넘겨 국채 신규발행을 중단하는 한편 광대한 서부의 땅을 개척민들에게 팔아 부채를 상환해 나갔다(서부 개척과 불하 과정에서 잭슨은 인디언들의 보금자리를 빼앗아 지금도 미국 인디언들에게 증오의 대상으로 각인돼 있다). 결국 빚을 갚고 돈이 남아돌게 된 잭슨은 잉여금을 주 정부에게 넘겨 철도와 운하 건설 붐을 낳고 임기 후반의 반짝 호황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점. 잭슨이 임기 말 단행한 통화정책(국유지 판매대금을 금화나 은화로만 받는다는 조치)으로 1837년 금융공황이 닥치며 국채도 증가세로 돌아섰다. 전쟁을 겪을 때면 부채는 가공할 속도로 늘어났다. 남북전쟁기에 10억 달러 선을 돌파하고 제 1차 세계대전기에 100억 달러 선을 넘었다.

더 큰 문제는 전쟁이 끝나면 채무가 줄어드는 패턴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깨졌다는 점이다. 구소련과의 패권경쟁으로 채무는 나날이 늘었다. 구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종식된 후에도 미국의 국채는 증가일로다. 채무 증가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 약화로 무역수지가 누적되는 데다 정부 지출이 줄지 않아서다. 특히 소련이 망하면 당연히 감소할 것이라고 믿었던 국방비가 요지부동이다.

늘어만 가는 국채는 이자에 이자로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지난 2009년 10월에는 초 단위로 움직이는 뉴욕시의 부채 시계전광판이 10조 단위를 표기할 자리가 부족해 작동을 멈춘 적도 있다. 미국 정부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풀어놓은 재정을 긴축하겠다고 나섰지만 과연 미국의 부채가 줄어들까.

미국 정부는 물론 온 국민(미국의 젊은 세대가 15년 뒤 부담해야 1인당 채무액이 24만 달러에 이른다는 보고서도 있다)들이 정신차리고 부채를 갚아나가는 게 근본적이 방책이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은 물론 독일같이 미국에 대한 수출에서 나오는 무역 수지 흑자로 경제를 운용하는 국가들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무역을 통해 동아시아로 유입된 막대한 달러가 미국 재무성 채권 매입의 형식으로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의 ‘글로벌 언밸런스’가 약한 얼음판이라는 사실은 모든 국가들이 알고 있는 문제다. 하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다. 현상을 고치려고 들 때의 고통을 그 어떤 국가도 감당할 수 없다는 데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미국이 중심으로 짜여진 세계경제가 아슬아슬하게 돌아가고 있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사족. 공교롭게도 1월 8일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대척점에 서 있던 니콜라스 비들(Nicholas Biddle: 1786~1844)이 태어난 날이다. 비들은 제2합중국은행 총재로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은행전쟁’을 펼친 인물. 금융 기득권 세력을 혐오했던 잭슨 대통령과 제2합중국은행의 존속 시한을 연장시키려던 비들간의 갈등이 은행전쟁이다. 미국판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금융이라는 마당에서 펼쳐졌던 은행전쟁은 잭슨의 압승으로 끝났다. 보수성향의 경제학자들은 1837년 미국의 경제공황을 잭슨 탓으로 해석하지만 이론이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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