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해가 되면 다양한 신년사·시무식사를 접하고는 한다. 그중에서도 올해 단연 눈에 띈 신년사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시무식사였다. "차가운 머리는 따뜻한 가슴을 이길 수 없다" "기계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메마른 법률가가 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곳보다도 냉철하고 메마를 것 같은 법원의 수장인 대법원장의 일성이었기에 신선했다.
한 사회를 규율하는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돼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저마다 각기 다르기 때문에 법을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처한 상황이 구구할진대 이를 몇 개의 규칙으로 재단해 결론을 내린다면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이 나올 리 만무하다. 법관의 존재 자체가 기계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양 대법원장의 시무식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보도된 몇 가지 판결 중에는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이 보인다.
예컨대 자식의 채무에 대해 연대보증을 선 A씨를 상대로 자식의 채권자가 채권추심을 구한 사안에서 법원은 "원고의 채권추심은 정당하지만 채권추심의 편의를 위해 A씨의 분할상환 제안을 거부하고 A씨 소유 주택에 대해 법적 절차를 취하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가족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밝히면서 화해권고 결정을 내렸다. A씨 자식은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고 손자를 A씨에게 맡긴 채 행방불명됐고 A씨는 고령의 남편과 아들 2명, 자식들이 맡긴 손자 5명과 함께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A씨의 분할상환 요청까지 거절하고 아홉 식구의 유일한 삶의 터전인 주택에 대해 강제집행 절차를 개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근 선고된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에 대한 판결도 눈에 띈다. 재판부는 윤 회장이 회사를 위해 사재를 출연한 점, 개인적 이익을 우선시한 정황이 없는 점, 그룹을 투명하게 운영해온 점 등에 비춰 실형을 선고하는 것보다 다시 한 번 기업을 경영하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양형기준상 권고형의 하한인 징역 4년보다 낮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검찰 또한 이 판결에 승복해 상고하지 않았다.
만약 재판부가 기계적으로 법을 적용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차가운 머리는 따뜻한 가슴을 이길 수 없다'는 양 대법원장의 시무식사는 위와 같은 판결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이제 막 시작된 새해에는 형사재판에서건 민사재판에서건 양 대법원장의 시무식사처럼 기계적으로 법을 적용한 메마른 판결이 아닌 법관이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판결이 많이 보이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