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파동의 후폭풍으로 경제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자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국민 생활 안정을 위한 긴급조치’, 즉 긴급조치 3호가 발동된 것이다. 1974년 1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긴급조치 3호는 혁신적인 내용을 담았다. 골자는 두 가지. 에너지 절약과 서민 생활 안정에 주안점을 뒀다.
△서민 조세 부담 경감과 △사치성 품목에 대한 중과세 △곡물 수매가 인상 △에너지 절약정책 강력 추진 △연간 경제성장률 목표의 하향 조정(11%→8%대)등을 골자로 하는 긴급조치 3호는 대다수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야당도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나섰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경제 비상 시국이라는 점에 이견이 없었다. 1973년 10월에 터진 제4차 중동전 이후 아랍권의 석유 무기화로 전세계가 휘청거리며 한국경제도 늪으로 빠져들던 상황. 무엇보다 유가가 석 달 사이에 4배나 올랐다. 화력발전의 단가 상승으로 전기 값이 오르고 덩달아 공산품 가격까지 뛰었다. 비료와 농약 구입비 상승에 따라 쌀 값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한국전쟁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1974년의 전년대비 도매 물가상승률(44.6%)은 이 시기 물가 오름세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말해주는 단면이다.
파동은 물가 급등에 그치지 않고 곳곳으로 번졌다. 기름을 구하지 못해 국내선 여객기와 연안 여객선, 시내버스가 툭하면 운행을 중단해 시민들이 고통을 겪었다. 기업들은 기계를 돌려봐야 손해라며 문을 닫았다. 주유종탄(主油從炭·기름이 주연료, 연탄은 보조연료)이던 에너지 정책은 주탄종유(主炭從油)로 되돌아왔다.
둘째, 대통령의 권한이 정점에 달했던 유신 초기, 서슬 퍼런 철권 통치 아래 정부 시책에 반대한다는 자체가 어려웠다.
세 번째, ‘긴조 3호’는 서민들의 입장에서 솔깃한 내용이 많았다. 건평 50평 이상의 주택 신축을 금지하고 기업에게 중과세한다는 내용에 야당으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긴급조치 3호는 모두 9개가 발동된 긴급조치 시리즈와는 성격 자체가 달랐다. 유신독재체제 유지를 위한 국민탄압용이라는 악명 속에서 민주화 이후 줄줄이 위헌 판정을 받은 다른 긴급조치들과 달리 경제 위기 대응책이어서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경제 정책이었기에 ‘긴조 3호’라는 공포 섞인 이름보다는 ‘1·14’조치로 불리는 긴급안정대책은 약발도 바로 들었다. 성행하던 매점 매석 행위가 자취를 감추고 경제 질서가 잡혔다.
대부분 국가의 성장률이 급락했던 1974년, 한국은 9.5%를 기록해 전년의 14.8%에는 훨씬 못 미쳤으나 상대적으로 양호한 실적을 거뒀다. 성장률은 1975년 7.5%로 주저앉은 뒤 1976년부터는 두 자리 수를 되찾았다. ‘국민 총화’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합심한 결과이지만 기업인들의 기여도가 특히 높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기업들은 이익의 80% 이상을 법인세로 내고 나머지로 사람을 뽑고 신규사업에 투자해 성장을 이끌었다.
당시의 신문을 찾아보면 놀라울 정도로 분배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경제가 어려우니 성장 과실을 나눠 성장 동력을 회복하자는 얘기가 42년 전의 화두였다니. 갈수록 심각해지는 양극화와 어려워지는 국제 경제 여건에서 지난해 외제차를 수입하는데 100억 달러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기업은 유신 시절에 비하면 4분의 1 수준으로 낮아진 법인세가 많다고 아우성이고 조금 산다 싶으면 외제차부터 굴리는 현실 속에서 1974년과 2016년의 양극단이 보이는 것 같다.
긴급조치 3호, 1.14 경제안정화조치가 발동된 1974년의 가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군나르 뮈르달(스웨덴)의 지적이 떠오른다. ‘한때 잘 나가던 중남미 경제는 공통의 이익을 위해 단결·조직하기보다 개인주의화하고 외국산 제품을 경계하지 않았기에 쇠퇴하고 말았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