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선의 우리술의 멋과맛] (13)운명

고구려 고분벽화인 ‘장천1호 묘 전실북벽 수렵도’(모사도).


#중국에 고구려 유민의 막걸리 자취

최근 한 모임에서 “막걸리와 같은 술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직접 가서 확인해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저자인 김병호 박사가 우리 민족의 기원을 찾던 중, 중국 운남성 쿤밍에서 김치, 장아찌, 시루떡처럼 생긴 음식과 쌀로 빚은 막걸리가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쓴 글이 어렴풋 기억이 났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2천여 년 전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곳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 연관성을 짐작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와 흡사한 전통 음식문화가 퍼져있는 곳이 비단 운남성뿐이겠는가. 우리 근대사에 있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의 정착지 또한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가 형성된 중요한 지역이다. 유럽의 패권을 눈앞에 두고, 도버해협에서 발길을 돌리며 “Geography is destiny.(지리가 운명)“이라고 했던 나폴레옹이 이를 보았다면, 아마도 ”Geography is not destiny.(지리는 운명이 아니다)”라고 수정했을지 모른다.

글로벌 ‘와인벨트’가 표시된 세계지도.


#전 세계에 우리의 ‘막걸리 벨트’를


우리는 간혹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놓일 때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농작물을 경작하며, 어떠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가? 또 그것은 어디에서 생산된 것인가? 등이다.

우리가 쌀을 재배해 떡을 쪄 먹고, 막걸리를 빚어 마셔온 것처럼, 서양인들은 밀과 포도를 재배해 빵을 구워먹고, 포도주를 마셔왔다. 우리 눈에 비친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 유럽인들의 외모는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이들이 어떠한 종류의 알코올을 마시는가를 보면 재미있는 지도가 그려진다. 유럽에서 북쪽은 증류주가, 중부는 맥주가, 남부 지역은 와인벨트(Wine Belt)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와인벨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지중해와 남부 유럽 일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좀 더 눈을 돌리면 이들 구(舊)세계 와인벨트는 북미주와 남미, 그리고 오세아니아주 일대와 남아프리카, 최근에는 중국 산동성 일부 지역까지 그야말로 신(新)세계로 확장되어 있다. 미국 중앙정보부가 발간하는 월드팩트북(CIA World Fact Book)을 보면 세계 와인 소비량은 2012년 한 해 평균 1인당 3.63리터로 전 세계 인구를 70억 명으로 추산해봤을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술은 단순히 알코올 음료가 아니다. 술잔 속에는 인류가 이룩한 기술적, 정신적, 사회·경제적 발전이 그대로 담겨 있다. 대항해시대와 달리 지금처럼 초국가적인(Transnational) 공간에서는 자연스레 이주가 일어나고 있으며, 본토와 유리되지 않은 채 문화적으로 결속된 교역망이 잘 발달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집안4호 묘 현실 일월신도’.


#새해엔 우리술의 새역사 쓰여지길

2012년 12월을 기준으로 외교부가 영주권자와 더불어 유학생과 일정기간(90일) 이상 거주자를 모두 합산하여 집계한 한국계 교민 수는 7백만 명에 이른다. 무엇보다 한반도에 유입되는 다문화 인구가 매년 늘어가고 있다. 이렇게 풍부한 인적 인프라에 주목한다면 와인벨트가 있듯이 머지않아 전 세계에 막걸리벨트가 형성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거 우리 민족 가운데는 조선이나 고구려 유민들처럼 아주 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이 되어 이역 땅에서 숨죽여가며 그 자취를 이어왔지만, 지금 우리는 다르다. 우리 역사에서도 가장 당당한 문화중심(文化中心)이 되어, 웅혼하고 번영했던 제국의 역사를 부활시킬 수 있는 역량과 패기가 충분하다. 새해에는 우리 술을 통해 한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며, 그 운명을 다 함께 개척해보자. /이화선 사단법인 우리술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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