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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선이는 정말 금사빠야." 응팔(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다가 올해 고2가 되는 딸이 한 말이다. "무슨 샅바?"라고 되묻자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진다는 뜻이야. 애들은 다 알아요"란다. 이에 나는 "그런 말 쓰면 못써, 아름다운 우리말을 곱게 써야지!"라고 말하지 않고, 껄껄 웃으며 "그래? 다른 신조어 있음 또 알려줘"라고 부탁했다. 아빠로서 이런 대응에 혹시 못마땅할 독자도 있겠으나 나는 그래도 딸과의 소통을 택하련다.
지난 한 해 인터넷에 신조어가 홍수를 이뤘다. 낄끼빠빠·편도족·혼술·지여인·텅장. 이 가운데 몇 개나 아시겠는가? 순서대로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자'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 '혼자 술 마시기' '지방대 여자 인문대생' '텅 빈 통장'이라는 뜻이다. 하나같이 처음 듣는 생경한 말 뿐이다.
지난해에는 흉흉한 신조어가 유독 많았다. 대학생 대상의 한 설문에서는 부유한 부모 덕에 세상을 편하게 사는 사람을 풍자한 '금수저'라는 말이 2015년 가장 많이 사용한 신조어 1위(31%)에 올랐고 지옥처럼 혹독한 한국 사회를 뜻하는 '헬조선'(23.8%)이 2위로 꼽혔다. 다음으로는 'N포세대'(12.8%·취업·결혼 등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 '취업깡패'(11.9%·기업들이 선호하는 이공계 전공자), '문송합니다'(10.1%·문과생이라 죄송합니다) 등이 선정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계층 서열화에 대한 좌절까지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통계청이 청년층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흙수저'도 노력하면 본인 세대에서 계층상승할 가능성이 "낮다"는 정서가 62.2%로 "높다"(21.8%)를 압도했다고 한다. 이런 결과를 보면서 19세기 영국 인상파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의 '운명의 수레바퀴'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커다란 수레바퀴에 붙박인 왕과 시인·노예의 모습에서 초기 산업사회의 신분적 속박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내 '운명의 수레바퀴'는 진실한 이미지라네. 우리의 차례가 오면, 우리는 그렇게 바퀴에 들러붙고 말지."
이렇게 퇴행적인 부조리는 19세기에나 가능했지 21세기 대한민국에는 가당치 않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지난해 출범한 서울경제 디지털브랜드 '썸'은 청년층의 아픔을 담은 콘텐츠를 만드는 데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았다. 특히 여기자 팟캐스트 '여수다방'에서 9월 초 방영한 '대한민국은 왜 헬조선이 됐나'편에서는 2030세대가 처한 현실을 살펴보고 나름의 해결방안까지 제시하기도 했다. 2030세대는 자포자기에서 벗어나 투지를 되살리기에 힘쓰고 어른들은 청년들의 고민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쏟아야 하며 정부는 신뢰를 회복해 젊은이들이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청년 실업률이 9.2%로 역대 최악의 수준까지 치솟았는데도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2030세대의 부정적인 평가가 80%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상황인데도 젊은이들과의 소통에 여전히 소극적이다. 설상가상으로 통계청의 '2015 한국의 사회동향'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자신감 상실' 수치는 평균치를 크게 웃돌고 스위스에 비해서는 6배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집단우울증이 청년층을 넘어 세대 전반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더구나 지금은 국민 대다수인 3,000만명 이상이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시대 아닌가. 지난 한 해 금수저·헬조선·N포세대 등 부정적 신조어가 이 정도로 인터넷을 뒤흔들었다면 경각심을 갖고 문제 해결에 나서야 옳다. '금사빠'가 뭔지, '낄끼빠빠'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나 자신부터 열린 마음을 갖기를 거듭 다짐해본다.
/문성진 디지털미디어부장 hnsj@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