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선거판을 봐도 그렇다. 피상적으로 보면 정말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 많아 보인다. 이토록 멋진 ‘스펙’을 가진 예비 정치인들이 선수로 등장하는 총선도 없었던 것 같다. 외국 대학을 나온 해외파 인재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화려한 공직 경험을 지닌 사람, 금융사 CEO 출신 인사까지 종합선물세트처럼 선거판에 나왔다. 여러 고장에서 난 먹거리가 풍성해 보이는 백화점 시식 코너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예비후보로 나온 사람들의 사무실에 걸린 현수막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메세지가 한결같다. ‘기분좋은 변화’, ‘정정당당’, ‘잘 사는 XX구’. 이 슬로건들은 분명 20년 전에도 봤었을 법한 구호들인데 아직까지 후보자들을 상징하는 문구로 나오고 있다. 남들과 똑 같은, 그것도 수 십 년 간 울궈 먹은 캐치프레이즈가 사용되고 있다면, 그의 지적 수준을 한번 의심해 봐야 한다. 공부를 안하고 있거나, 아니면 선거를 이미 내 왔던 음식 재활용하는 수준의 판으로 오인하고 있거나.
정치인이 자기 철학과 소신을 간명한 문구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적어도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생각과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온 마음과 혼을 다해 피를 토하도록 자기 이야기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다른 선거구에서도 쓸법한 공약과 구호를 갖고 이 지역 사람을 설득하겠다는 것은 이기주의다. 자격이 의심스럽다. A라는 연극을 상연하고 있는데 배우가 옛날에 외운 B라는 작품의 대본을 읊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지금 우리네 선거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설픈 선무당 점을 한번 쳐 보려 한다. 올 4.13 총선은 철저히 ‘맞춤화’선거가 될 거라고 말이다. 현역 교체 요구가 다른 때에 비해 유난히 높고, 유권자의 명확한 요구를 발견하기 어려운 때다. 이런 판에서는 정치인 자신이 아니라 표를 주는 사람들의 상황과 맥락을 읽을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한 법이다. 지역마다 특색화된 전략, 마케팅 방법으로 스스로를 스타일링하려는 노력 없이는 1표도 가져가지 못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이미 선거판은 난전이다. 거물급 야권 정치인이 나온 지역구에 방송에서 이름을 알린 청년 보수 정치인, 그리고 야권 청년 운동을 선도해 온 인물 등이 어우러져 누가 승기를 거머쥘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누가 어디에 나온다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정작 중요한 ‘각각의 이야기’는 무엇인지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차별화된 철학과 정책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현상이 다른 동네에서도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후보들이 고민하고 해결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정치를 시작하려는 분들께 이야기하고 싶다. 적어도 자기 생각을 한 두 단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정치를 때깔 좋은 전문직 쯤으로 여기고 선거판에 나왔다면 자격 미달이라는 점도.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