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잃어버린 전통장례, 씁쓸한 상가단상

역대 대통령서 '위안부' 할머니까지… 일제 잔재 삼베수의 입고 마지막길
광복 72년째 장례문화 주권 못찾아 비단 수의 등 전통보전 노력 필요한 때


지구온난화의 역습으로 최근 한파가 몰아쳐 꽁꽁 얼어붙었던 여파인지 몰라도 가까운 친지나 지인들의 상(喪)이 적지 않다. 고인(故人)의 삶을 반추하는 것도 안타깝지만 장례풍습을 봐도 씁쓸하다. 광복 72년째를 맞았지만 아직도 장례 주권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17일 서울 대학로 상명아트홀에서 '땅으로 시집가는 날'이라는 전통수의 전시회 개막식을 갖는 최연우 단국대 전통복식연구소장은 기자에게 "삼베수의(壽衣), 유족의 완장과 리본, 영좌(靈座) 꽃장식까지 일제 장례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며 비단 수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국대는 조선 출토복식(出土服飾·무덤에서 발굴된 옷) 수천점을 보유한 '석주선기념박물관'이 있다.

전통장례에서 수의는 '생전에 입던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썼다. 관리는 관복(官服)을, 선비는 심의(深衣)를, 여성은 원삼(圓衫) 혼례복을 사용했다. 소재는 누에고치의 실로 만든 비단이나 명주, 목화(木花)에서 나온 무명으로 했다. 이는 1474년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른 것이다. 최 교수는 "조선 무덤은 회삼물(灰三物:석회·황토·모래로 반죽)로 두르고 관(棺)도 옻칠을 여러 번 해 비단·무명·모시로 된 수의가 다수 발견되지만 삼베는 한두 점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통수의가 변질된 것은 조선총독부가 1934년 '의례준칙(儀禮準則)'을 통해 비단과 명주 수의를 금지하고 삼베수의·완장·리본 등을 강제로 쓰도록 하면서부터다. 당시의 궁핍한 경제사정도 있겠지만 전통장례에서 부모님을 여의면 '죄인'이라는 뜻으로 상주(喪主)가 입던 거친 삼베 상복을 고인에게 수의(囚衣·죄인의 옷)로 입게 해 장례문화를 격하시킨 것이다. 대마초 중독자가 늘어날 경우 우리 민족의 저항의지가 꺾일 것이라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추정된다. 상여(喪輿) 종이꽃 외에는 상가에서 생화를 사용하지 않던 전통장례도 1920년대 들어 일본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근조화환(謹弔花環)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1980년대부터는 아예 영좌를 국화로 장식하는 게 대중화됐다. 더욱이 1976년 대마관리법 시행 뒤 삼베가 고급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확산되며 중국산 짝퉁마저 판치게 됐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행정자치부가 주관한 국가장(國家葬)에서 삼베수의를 입고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앞서 국장(國葬)과 국민장(國民葬)으로 각각 장례가 치러진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삼베수의를 입고 마지막 길을 떠났다. 그분들의 빈소와 분향소 영좌 역시 국화로 장식하는 등 일본풍으로 꾸며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가족은 일제 잔재인 완장을 팔에 두르지는 않고 가슴에 삼베 리본만 달았지만 이것도 조선총독부 의례준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13~16세의 꽃다운 나이에 강제로 끌려갔던 '전시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마저 삼베수의를 입고 국화에 둘러싸인 채 한 많은 인생을 마치고 있는 실정이다.

1982년 겨울 기자의 조부님 상이 났을 당시만 해도 전통장례가 살아 있어 동네사람들이 우리집에 다 같이 모여 장례를 치렀다. 수의는 비단과 명주 등을 썼다. 발인(發靷)시 고인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지은 글을 기(旗)로 만들어 대나무에 건 수십 개의 만장(輓章)이 앞장서고 수십 명의 상여꾼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상엿소리를 구슬피 부르고 삼베옷을 입은 유가족과 동네사람 수백 명이 산소까지 뒤따랐다. 장례 이후 1년간 매달 삭망(朔望·초하루와 보름)에 유가족은 삼베옷을 입고 산소에서 제를 올리고 집에서도 신주(神主)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제는 급속한 도시화로 병원에서 간편하게 장례를 치른 뒤 운구차로 화장장이나 공동묘지로 가는 식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전통 장례의식을 떠올리면 참 품격 있는 문화였다는 게 느껴진다.

/고광본 정보산업부장 kbg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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