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사진은 못 찍었지만, 이 길도 지나쳤습니다. 사진 출처는 구글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미국 LA 라시네가 대로의 이글라이더 매장 앞, 여행가방과 함께 덩그라니 섰습니다. 다시 걱정이 몰려옵니다. 혹시 앞으로 6시간 후쯤 내가 크게 다쳐있는 건 아닐까? 후미진 동네에 멋모르고 들어갔다 멕시코 갱단에 납치당한다면? 갖은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이글라이더 매장 외부를 둘러봅니다. 이렇게 렌탈용 바이크들이 늘어서 있고, 한쪽엔 렌탈용 헬멧들이 쌓여 있습니다.
다 타보고 싶음
무료로 빌려주는 헬멧, 하지만 풀페이스는 없다는...
그리고 이런 표지판이 있습니다. 여행자들의 감수성을 전형적으로 자극하는 표지판!!나름의 장식 효과
서울도 있네요. 여기로부터 5,956마일.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게도 다시 용기가 납니다. 매장은 생각보다 넓습니다. 실제로 판매하는 바이크(신차)도 전시돼 있고, 재킷이나 헬멧 등 용품도 꽤 진열해뒀습니다.
바이크와 용품이 어우러진 훈훈한 매장 내 풍경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아메리칸 바이크, 용품 위주의 구성
그리고 저는 렌탈용 헬멧을 쓰기 싫다고 생각하던 차에 한국에서부터 찾던 ‘벨 불릿 RSD 비바’ 헬멧을 봐 버렸습니다. 벨 사가 절판을 결정했는지, 한국에선 사이즈가 없는 데다 수입사에 문의해 봐도 추가 수입 계획이 없다는 답변만 들었던 제품입니다. 449.95달러, 약 50만원의 고가품이지만 여행자의 들뜬 기분 혹은 허세 탓일까요. 시원하게 카드를 긁었습니다. 하필이면 지난번 일본에서 득템한 재킷(두유바이크 13회 참조)과 참 어울립니다.
방 안에 머리 없는 사람인 줄...ㄷㄷㄷ
이미 예약과 결제를 온라인으로 끝냈기 때문에 각종 서류에 서명만 하면 됩니다. 여행가방은 카운터에 맡기고, 간단히 GPS 이용법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한국 내비만큼 화려한 그래픽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냥 저냥 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진은 엉성하지만 단순한 GPS 화면 구성에 집중해 봅시다
순박한 인상의 히스패닉계 직원, 제이슨이 어디로 갈 생각이냐고 묻습니다. 샌디에고 근처 ‘레고랜드’에 갈 생각이라고 말하자 웃습니다. 바이크를 빌려 타고 레고랜드에 간다는 사람은 처음이라네요. “그래, 내 생각에도 좀 이상해(…)”라고 답해줬습니다.
그래요, 이런 곳입니다. 하지만 꼭 아이들만 레고를 좋아하란 법은 없잖습니까?
입구부터 레고스러운 레고랜드
어쨌든 시간이 촉박하니 얼른 GPS에 ‘레고랜드’를 입력하고 출발합니다. 대략 이런 경로로 레고랜드에 도착해 잠시 구경하고 돌아올 계획입니다.정확히 이 길로 달리진 않았지만, 대략 이런 루트였습니다. 중간 중간 멈추느라 실제로 걸린 시간은 왕복 약 5시간에 가까웠던...
참고로, 미국에서 모터사이클 여행을 나서기 전 꼭 체크할 만한 사이트가 있습니다. 바로 모터사이클로즈닷컴(www.motorcycleroads.com)입니다. 달릴 주(州)를 택하면 이렇게 추천 루트가 뜹니다. 다시 돌아가서 달리고 싶어집니다
원하는 루트를 클릭하면, 경치나 도로 상태가 얼마나 좋은지 등을 별점과 약간의 설명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로에 어떤 볼거리와 맛집이 있는지도 ‘어트랙션(Attaction)’ 메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근처에서 열리는 모터사이클 관련 모임·행사 정보도 제공합니다. 미국 라이더들과 부대껴보는 건 어떨까요?이번에도 영어에 기죽지 말자
이런 훌륭한 웹사이트같으니라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봅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트라이엄프 본네빌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로 산 벨 불릿 헬멧과도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소한 짐은 바이크 양쪽에 달린 새들백에 몰아넣고, 무료로 빌려주는 디스크락도 챙겨서 이제 시동을 겁니다.
내 눈도 반짝반짝
헬멧 안 샀으면 어쩔뻔...
무료로 빌려주는 디스크락도 챙겼습니다. 예약할 때 홈페이지에선 체인락도 빌려준다고 했는데, 별 얘기가 없네요. 사실 좀 귀찮기도 했는데 그냥 나서기로 했습니다. 낡았지만 든든한 디스크락
그런데 역시 저는 생초보입니다. 230㎏ 무게의 865cc 바이크를 평소 타던 울프 클래식처럼 아무 생각 없이 끌고 출발해서 살짝 좌회전하려다 그만! 넘어져 버렸습니다. 2015년 들어서 넘어진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하필 미국에서 렌탈 바이크로 넘어져 버리고 마네요. 저는 다치지 않았지만, 넘어져도 본인보다 바이크를 더 걱정하는 것이 라이더들의 본능…. 얼른 일어나 살펴보는데 클러치 레버 끄트머리의 동그란 부분이 똑 잘렸습니다.
이 순간 정말 스스로 자책했습니다. 조금만 주의하면 될 걸 기어코 넘어뜨리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마음껏 비웃으시라
하지만 제이슨과 또 다른 직원은 싫은 혹은 비웃는 기색 하나 없이 바이크를 일으켜 세우고는 침착하게 바이크를 점검합니다. 몇 번 스로틀을 당겨 보더니 괜찮다며, 잘 타고 다녀오라며 다시 손을 흔들어줍니다. “부러진 끄트머리는?” “응, 이건 내가 가지면 돼.” 씩 웃네요.
거듭 미안하다며 사과한 후 다시 출발합니다. 물론 수리비 청구는 없습니다. 두유바이크 14편(클릭)에서 미리 보험을 들어뒀으니까요! 그건 정말 잘 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처음엔 이글라이더 인근 도로에서 본네빌에 대한 감이라도 좀 익히고 가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계획보다 출발 시간이 늦었습니다. 바로 GPS를 따라 달렸더니 고속도로로 진입합니다.
최대한 해안을 따라 달리는 길을 택…하려고 노력했는데 가는 길엔 거의 고속도로만 달린 것 같습니다(…).
유조차와 화물 트럭이 쌩쌩 달리는 LA의 고속도로
그래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이륜차가 고속도로를 달릴 수가 없으니까요. 일단 고속도로에서 남들보다 조금 천천히 달리며 감을 쌓아봅니다. 미국 고속도로에선 조금 느리게 달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끼어드는 차는 거의 없고, 차선 변경을 위해 깜빡이를 켠 차가 보이면 젠틀하게 양보를 해 줍니다. 1차선은 주로 카풀용 도로(Carpool lane)입니다. 카풀이라고는 하지만, 2인 이상만 타고 있으면 소형차든 버스든 상관 없이 이용해도 됩니다. 고속도로 카메라는 거의 없는 듯했지만 나 먼저 빨리 가겠다고 1인 차량으로 카풀 도로를 달리는 경우도 드물어 보였습니다.
시속 100㎞, 110㎞ 정도의 속도 제한은 있었지만 칼같이 지켜지지는 않는 듯했습니다. 대신 지나친 과속 차량도 못 봤습니다.
결정적으로 고속도로에서 바이크를 몇 대 못 봤는데요. 오후 퇴근시간대쯤 길이 막히자 우리나라처럼 갓길로 달리는 바이크 한두 대가 눈에 띄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바이크가 차 사이로 달리는지, 혹은 우리나라 라이더들처럼 한적한 도로에서 마주치면 손인사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제보 부탁드립니다.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이름 모를 산등성이
한 시간쯤 달린 후 자신감이 붙자 속도를 좀 올려봤습니다. 물론 다른 차들도 모두 속도를 내는 한산한 구간에서입니다. 시속 100㎞를 넘어 120㎞, 140㎞까지. 모터사이클로는 처음 경험하는 속도까지 오르자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실감이 듭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속도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본네빌은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데, 맞바람이 너무 거세져서 목과 상체가 뒤로 꺾일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공기저항을 덜 받도록 만든 R차(레플리카)가 아닌 바에야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새로 산 벨 헬멧은 너무너무 예쁘지만 풍절음이 너무 심합니다. 마지막으로…추웠습니다. LA 한낮 기온이 20도 정도란 포탈 날씨 정보만 믿고 갔는데, LA에서 달리는 내내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떨며 달렸습니다. 결국 더 이상 속도 내기는 포기하고 클래식 바이크다운 속도로 여유롭게 달려봅니다.
도로 상태가 한국보다 별로일 것이란 이야길 듣고 갔는데, 제가 달린 길은 달리기 나쁘지 않았습니다.
고속도로 중간에 들른 뷰포인트입니다. 참 멋진 풍경이라, 이 한 컷만으로도 한국에서 날아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단 느낌이었습니다.
극락이로세
다녀와서 보니 제일 아쉬운 건 귀찮다고 액션캠을 안 챙겨간 겁니다. 영상이라도 남겨와야 했는데, 중간 중간 멈춰서 찍은 몇 장이 전부입니다. 사진 자체도 찍기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조금 찍다 말았는데 이 역시 후회됩니다. 제 눈만 호강하고, 두유바이크는 부실해지고 말았습니다. 바야흐로 고양이도 셀카 찍는 21세기/출처=구글
오는 길엔 좀 더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습니다. 돌아올 때 역시 예상보다 시간이 늦어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못했지만, 해변 주택가에서 바라 본 이런 풍경에 마음도 탁 트였습니다. 미국에서의 운전은 한국보다 쉬운 편입니다. 두어 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우선 스쿨버스! 도로 앞에 가던 스쿨버스가 아이들을 태우거나 내려주기 위해 정차하면 뒤따르던 차들은 차선 상관 없이 모두 멈춰야 합니다. 왕복 4차선 도로에서 스쿨버스가 4차선에 멈추더라도 1,2,3차선 차들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스톱’ 사인은 국도든 주택가든 칼같이 지켜야 합니다. 아무도 없어뵈는 조용한 주택가 교차로라도 스톱 사인이 보이면 2,3초 간 완전히 정차한 후 재출발합니다. 자칫하면 어디선가 잠복해 있던 경찰이 나타나기도 한다네요.
사거리에서의 좌회전은 비보호가 대부분이고, 유턴도 별도의 금지 표시가 없으면 따로 신호를 받을 필요 없이 적당히 하면 됩니다. 맞은편에도 좌회전이나 유턴을 기다리는 차가 있다면 먼저 온 순으로 갑니다. 이런 당연한 원칙이 당연히 지켜집니다. 성숙한 운전 문화가 있기에 가능한 거겠죠. 미국이라고 김여사 김사장이 없겠습니까만은….
LA의 한 주택가에서 바라본 라구나 비치
1, 2편으로 끝내려 했던 ‘미국편’이 3회까지 길어지게 됐습니다. 마지막 편에선 본네빌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본격적인 시승 소감은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유주희기자 ginger@sed.co.kr※부록으로 목적지인 레고랜드의 사진 몇 장을 남겨봅니다. 레고 광팬이거나 어린이 동반이라면 강추, 그렇지 않다면 조금 심심할 수 있습니다.
레고로 만든 마을
레고로 만든 도시를 깨알같이 날아다니는 산타클로스
레고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알려줍니다
‘건들면 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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