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국제 무역. 지리상의 이점을 살려 쿠웨이트 상인들은 인도양과 중동 전역을 오가는 무역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두 번째는 조선산업. 인도에서 목재를 수입해 전통 다우(Dhow)선을 건조, 중동 각지에 팔았다. 1917년에는 550톤이 넘는 대형 다우선을 건조해 바다에 띄운 적도 있다. 쿠웨이트의 크고 작은 조선소에서 제작한 다우선들은 무역과 어업은 물론 진주채취업에 주로 쓰였다.
예전 쿠웨이트 지역을 잘사는 곳으로 만들어 준 세 번째 요인이 바로 진주다. 연안 바다인 페르시아만 입구에서 많을 때에는 1,000척의 선박과 3만명이 넘는 잠수부가 진주를 캐냈다. 오늘날까지 최고급 천연진주의 산지로 유명한 페르시아만 입구의 바다가 주는 선물로 쿠웨이트는 중동지역에서 상대적으로 풍요를 누렸다.
잘 나가던 쿠웨이트 경제는 1920년대부터 곤두박질쳤다. 갑작스러운 쇠퇴의 이유도 크게 세 가지. 먼저 사우디아라비아의 일부 지역인 나즈드(Najd)와 전쟁에 패해 영역이 좁아졌다. 무역 역시 오그라들었다. 1929년 미국 뉴욕 중시의 대폭락으로 촉발된 세계 대공황 탓이다. 국제 무역이 순식간에 3분의 1토막 나는 상황에서 쿠웨이트의 상업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흥청거리던 천연 진주 채취업은 더욱 큰 타격을 받았다. 한 사람의 일본인 때문이다. 쿠웨이트를 파탄지경으로 몰고 간 주인공은 미키모토 고키치(御木本幸吉). 불굴의 집념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진주 양식에 성공한 사람이다. 20세기의 연금술처럼 양식 진주가 처음 등장했을 때 서구인들은 반겼을까. 반대다. 고키치가 특허를 출원하자 유럽에서는 ‘어떻게 생명에게 특허를 줄 수 있냐’는 논란이 불거졌다.
시간이 흐르며 천연 진주와 양식 진주는 차이가 없다는 보고서가 나오고 일본인들의 남다른 품질관리(조금이라도 불량이 있으면 태워버렸다)로 양식 진주가 자리를 잡자 쿠웨이트 경제는 끝을 모를 침체에 빠졌다. 선박은 방치돼 해안에서 썩고 직업과 생활의 터전을 상실한 잠수부들은 사막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경제가 거덜 난 유목민 집단 쿠웨이트의 대안은 지하자원 개발. 알 아마드 수장은 1934년 말 3만 5,700파운드의 선금과 석유 발견시 연간 7,150파운드씩 받는다는 조건으로 미국과 영국계 자본이 설립한 ‘쿠웨이트석유’에 75년간 석유 이권을 넘겨주는 협정을 맺었다. 진주가 쿠웨이트의 유전 개발을 부추긴 셈이다.
페르시아(이란)에서 유전이 처음 발견(1908년)된 이래 이라크(1927년)ㆍ바레인(1931년) 등 중동 각지에서 대형 기름밭이 잇따라 나타난 터. 석유부존 가능성을 확신했던 미·영 석유자본의 기대대로 소규모 인력과 장비만으로 탐사에 나선 지 3년 만인 1938년 2월 23일, 쿠웨이트 동남부 부르간(Burgan) 지역에서 원유가 치솟았다.
석유의 역사와 이권을 둘러싼 국제 자본의 암투, 시장의 형성 과정에 대한 기념비적인 서적으로 손꼽히는 다니엘 예긴의 ‘황금의 샘’에 따르면 처음 분출되는 원유가 얼마나 많았는지 불이 붙으니까 부근의 모래가 녹아 유리로 바뀔 정도였다. 아직도 세계 3대 유전으로 꼽히는 부르간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쿠웨이트 유전 발견 8일 뒤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초대형 유전이 터졌다. 공급과잉과 가격하락 우려에 따라 2차대전 말부터 이뤄진 두 유전의 본격 채굴 이후 세계는 중동산 석유 시대에 접어들었다.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형 유전은 지난 2005년부로 이미 정점을 지났다. 부르간 유전의 생산량은 해마다 14%씩 줄어들고 있다.
국제 유가마저 바닥을 기고 산유국들마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국채를 발행하는 오늘날 현실에서 인간과 자원을 생각해 본다. 인간의 땀과 노력, 끈기의 결정체인 양식 진주는 오늘날 세계 진주 거래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부가가치도 높다. ‘검은 황금’으로 칭송하고 부러워했던 원유는 정녕 신의 선물이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땅 속의 거대한 노다지보다 인간이야말로 소중한 자원이라는 얘기인데, 머리가 어지럽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다. 아이들에게 얼마나 희망을 줬는지 장담할 수 없기에. /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