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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그룹이 신규 순환출자 금지를 위반했다며 삼성SDI의 삼성물산 주식을 처분하라고 지시한 후 삼성그룹은 지분 처분을 놓고 고심해왔다.
처분 규모가 7,5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인데다 시장 상황이 썩 좋지 않았던 탓이다. 이 과정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나섰다. 삼성SDS 지분을 매각해 생긴 3,000억원 가운데 2,000억원을 삼성물산 주식을 매입하는 데 쓰기로 한 것이다.
실제 이 부회장은 굳이 삼성물산 지분을 추가로 사들일 이유가 적었다. 이미 이번 물산 주식 매입 전에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지분을 16.5%나 갖고 있었다. 그룹 전체적으로 소유 지분이 39.9%에 달했다. 삼성물산이 사실상의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사주를 더하면 50%가 넘어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번에 SDS 주식을 매각한 돈의 상당 부분을 삼성물산 지분을 매입하는 데 쓴 것은 책임경영의 일환이라는 게 재계의 평가다. 이는 나머지 5,500억원의 향방을 보면 이해가 쉽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삼성물산 의무 매각 지분 중 3,000억원을 가져오기로 했다. 시장 소화물량은 블록딜(대량매매)로 처리되는 2,500억원 수준이다. 그만큼 처분 주식이 많고 금액이 커 한 번에 해소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게다가 당장 다음달 초까지 주식을 팔아야 해 물리적인 시간도 부족했다.
삼성의 고위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이미 삼성물산에 대해 확고한 지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추가 지분매입으로 지배력이 더 강해지는 것은 없다"며 "다른 계열사가 SDI가 갖고 있는 삼성물산 지분을 인수하게 되면 다시 순환출자 고리가 생기는 꼴이 돼 상당 부분을 이 부회장이 인수하기로 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생명공익재단은 예금 위주로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데 자본수익을 감안하면 삼성물산의 주식에 투자하는 게 유리하다"며 "재단 입장에서도 괜찮은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이 부회장의 책임경영은 엔지니어링이 보유한 자사주 300만주(302억원 규모)를 취득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삼성엔지니어링이 대규모 적자를 내고 올 들어 유상증자를 추진하게 되자 이 부회장은 최대 3,000억원 규모로 유상증자에 참여하기로 한 바 있다. 하지만 구주주 청약률이 99.9%에 달해 실권주가 많이 나오지 않자 일반공모에는 참여하지 않고 자사주 인수 및 다른 방법을 통해 주식을 사기로 했다. 이 부회장은 이번 300억원 규모의 엔지니어링 지분 매입 이외에 추가로 700억원어치의 주식을 더 사들일 예정이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삼성엔지니어링의 사업과 경영 정상화에 큰 관심과 의지를 갖고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삼성 안팎에서는 이 부회장이 경영에 있어 자신만의 굵은 선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 1·2차 빅딜을 비롯해 전용기와 삼성생명 본관 매각, 제일기획의 해외매각 검토 등은 이 부회장이 실용을 잣대로 그룹체제보다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계열사를 원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여기에 이번에 이 부회장이 보여준 책임경영은 이 부회장이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팔기만 하는 삼성"이 아닌 필요와 상황에 따라 지킬 것은 지키고 지원해줄 부분은 끝까지 밀어준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삼성은 이날 이 부회장이 추가로 삼성SDS 지분을 매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부회장의 삼성SDS 지분은 그룹 재편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번 자금은 이 부회장의 삼성SDS 주식을 일부 매각해 조성했으나 현재 추가로 SDS 지분을 매각할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재계의 고위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점차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다"며 "앞으로 사업재편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영필기자 susopa@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