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방망이 처벌 부추기는 '양형 기준'

범죄군 32개 중 27개 양형기준이 법정형보다 낮아
강도상해 최소 7년형이지만 양형 기본영역은 3~7년
"형량 높으면 법 고쳐야, 자의적 솜방방이 처벌 안돼"

#. A씨는 지난해 10월 허락 없이 빵을 먹으면서 빵가루를 흘린다는 이유로 5살짜리 딸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멀리 나가떨어졌던 딸이 다시 아빠 곁으로 기어오자 A씨는 다시 배를 발로 찼다. 또 다시 딸이 다가오자 A씨는 분이 덜 풀렸는지 한 번 더 딸의 배를 때렸다. 딸은 한 시간 뒤 내장이 파열돼 사망했다. 지난 1월 7일 대구지법 서부지원은 아동학대치사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다.

아동학대처벌 특례법에서 아동학대치사죄는 최소 징역 5년, 최대 무기징역으로 다스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 지난해 온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크림빵 뺑소니’ 사건. 임신 7개월 된 아내에게 줄 크림빵을 사 들고 집으로 가던 20대 가장을 차로 치어 죽이고 도망친 이 사건에서 법원은 범인에게 1심과 2심 모두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은 교통 사망 사고를 낸 뒤 달아난 운전자에게 무기징역 또는 징역 5년 이상의 형벌을 내리도록 하고 있다.

범죄자에 대한 우리나라의 형벌 수준은 외국과 비교해도 무거운 편이다. 하지만 위 사례처럼 법정형에 못 미치는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근본적인 원인은 법원의 ‘양형 기준’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양형 기준은 대법원이 범죄 유형별로 지켜야 할 형량 범위를 정해 놓은 것을 말한다.

법정형은 보통 몇 년 이상, 몇 년 이하 등으로 범위가 넓으므로 죄질에 따라 처벌 수위를 세분화한 것이다. 예컨대 강간죄의 기본 영역은 징역 2년 6월∼5년, 참작할 요소가 있으면 1년 6월∼3년(감경 영역), 죄질이 나쁘면 4년∼7년(가중 영역) 등으로 형량을 정했다. 판사들은 이러한 양형기준에 따라 피고인들의 형량을 정한다.

문제는 양형 기준 자체가 법이 명하는 처벌 수위에 못 미치는 낮은 형량을 설정해 놨다는 점이다. 법원의 내부 규칙이 국민이 국회를 통해 만든 법을 무시하고 있는 꼴이다.


14일 서울경제신문이 32개 범죄 군에 대한 법정형과 양형기준을 비교한 결과 84%에 이르는 27개 범죄 군에서 양형기준이 법정형보다 낮은 이탈 현상이 나타났다. 성범죄, 뇌물, 폭행, 조세범죄 등 웬만한 범죄는 다 포함된다.

현행법에 따르면 강도를 저지르면서 사람을 다치게 한 ‘강도상해’의 경우 최소 7년 형을 선고해야 한다. 하지만 양형 기준은 강도상해의 기본 영역을 징역 3∼7년으로 설정했다. 특별히 봐줄 만한 요소가 없는 보통의 강도상해범도 법이 정한 최소 형량보다 낮은 벌을 받도록 기준이 마련된 것이다. 또 강도상해의 최고 법정형은 무기징역이지만 양형 기준의 최고치는 12년에 그친다.

뺑소니로 사람을 치어죽인 범죄는 법정형이 무기 또는 징역 5년 이상이지만 양형 기준의 기본 영역은 3~5년, 최대 9년에 불과하다. 크림빵 뺑소니 사건과 같은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경제 범죄에도 너그럽긴 마찬가지다.

금융회사 임직원이 부정한 청탁을 받고 뒷돈을 받았을 때 법은 수수한 금액이 3,000만∼5,000만원이면 징역 5년 이상, 5,000만∼1억원은 7년 이상, 1억원 이상은 무기 또는 10년 이상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범죄 양형 기준의 기본 영역은 각각 3∼5년, 5∼7년, 7∼10년 이상으로 법정형 하한보다 2∼3년 낮다.

양형 기준이 낮다 보니 실제 법원 선고형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본지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최근 6개월간 전국 법원에서 강도상해죄(경합범 제외)가 인정된 72명의 평균 형량을 조사해 보니 징역 3년 7월이었다. 법정형 최소 형량인 7년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3년 6월이 선고된 경우가 45명으로 제일 많았고 집행 유예도 9명이나 됐다. 가장 무거운 처벌은 징역 7년으로 3명에 그쳤다. 그나마도 이들 3명 중 1명은 강도상해죄로 징역 2년, 강도강간미수죄 등으로 6년형을 받은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사 범죄를 3차례나 저지를 정도로 죄질이 나빠야 겨우 법정형의 최소 형량이 선고되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양형기준이 법정형을 이탈하는 현상에 대해 “양형 기준을 정할 때 최근 5년간 해당 범죄에 내린 선고 형량의 평균치를 조사해 이를 기반으로 기준을 설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적절한 해명이 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법정형을 지키지 않은 과거 관행을 그대로 ‘표준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다.

노명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처럼 법정형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도 드물다”며 “판사들이 보기에 법으로 정한 형량이 높다 하더라도 이는 국민의 의견 수렴을 거쳐 법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법원이 자의적으로 양형 기준을 낮게 설정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건 명백한 월권”이라고 꼬집었다. /서민준기자 morandol@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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