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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한 A기업 김 대리는 회의 2개와 임원보고 준비로 눈코 뜰 새 없는 오전을 보냈다. 점심식사 후 임원보고가 끝나자마자 대책회의가 이어졌고 외근에서 돌아오니 타부서의 업무요청 사항이 밀려 들어와 있었다. 부랴부랴 급한 일 처리를 끝냈지만 정작 대책회의 결과 보고서 작성은 손도 못 댄 상태다. 별수 없이 오늘도 야근을 해야 한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한 김 대리가 보고서 수정작업을 끝낸 시간은 밤10시30분. 내일 보고에서 내용이 얼마나 바뀔지를 걱정하며 귀가를 서두른다.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는 국내 기업들이 늘고 있으나 조직문화는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서가 나왔다. 잦은 야근과 비생산적인 회의, 상명하복식 업무지시 등으로 조직건강도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진단이다. 이처럼 병든 조직으로는 저성장의 파고를 이겨낼 수 없는 만큼 구시대적인 기업문화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 기업운영의 소프트웨어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처방이 제시됐다.
◇"국내 기업 조직건강은 중병 수준…임원실은 장례식장 같아"=대한상공회의소와 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지난해 6월부터 9개월간 국내 기업 100개사 임직원 4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문화 종합진단 보고서'를 15일 발표했다.
진단은 맥킨지의 조직건강도(OHI·Organizational Health Index) 분석기법을 활용했다. 리더십, 조율·통제, 역량, 책임소재 등 9개 영역의 37개 세부항목을 평가 점수화해 글로벌 기업 1,800개사와 비교했다.
진단 결과 국내 기업의 조직건강은 중병을 앓는 수준이었다. 조사 대상 100개사 중 최하위 수준 52개사를 포함해 77개사가 글로벌 기업에 비하면 조직건강도가 약체로 평가됐다. 중견기업은 91.3%가 하위 수준이었다.
영역별로 보면 한국 기업은 리더십과 조율·통제, 역량, 외부지향성에서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앞서 김 대리의 사례처럼 직장인들은 습관적인 야근을 가장 심각한 기업문화로 꼽았다. 한국형 기업문화에 대한 호감도에서 '습관적 야근(31점)'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고 '비효율적 회의(39점)'와 '과도한 보고(41점)' '소통 없는 일방적 업무지시(55점)' 순이었다.
야근 실태조사 결과 한국 직장인들은 주5일 기준 평균 2.3일은 야근을 하고 3일 이상 야근자도 43.1%에 달했다. 이처럼 야근을 밥 먹듯 하지만 업무시간과 성과는 오히려 떨어지는 '야근의 역설'도 확인됐다. 8개 기업 45명의 일과를 관찰한 결과 상습적으로 야근하는 A 대리는 하루 평균 11시간30분을 근무했고 나머지 직원들은 하루에 9시간50분씩 일했다. 그러나 A 대리의 생산성은 45%로 다른 직원들(57%)보다 낮았다.
상명하복식 불통문화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와 관련해 국내 기업에서 임원으로 재직한 T씨는 "한국 기업의 임원실은 마치 엄숙한 장례식장 같다"며 "불합리한 리더의 업무지시에도 '와이(why)'도 '노(no)'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것을 보고 한국 기업의 업무방식이 쉽게 개선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여성 핸디캡과 편견도 여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전히 여성이 평가·승진에 불리하다(49점)'는 응답이 나왔고 여성이 불리한 이유로는 '출산육아로 인한 업무공백(34.7%)'이 가장 많았으나 '업무능력 편견(30.4%)'도 많이 꼽았다. 심각한 구태문화로 지적되던 회식문화는 크게 개선된 것으로 조사됐다. 회식이 업무와 개인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응답이 76.7%에 달했고 실제 회식 횟수도 주 평균 0.45회로 조사됐다.
◇상의, 액션플랜 마련해 조직건강 체질개선 나선다=국내 기업의 조직건강이 중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과 함께 이를 개선하기 위한 처방전도 나왔다. 정시퇴근을 유도하기 위해 사무실 전등을 일제히 끄고 여성인재 활용을 위해 육아휴직과 보육시설을 확대하는 등의 대증요법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근본 원인을 찾아 외과수술 하듯 치료하겠다는 것이다.
대한상의는 △비과학적 업무 프로세스 △비합리적 평가보상 시스템 △리더십 역량 부족과 기업 가치관의 공유 부재를 국내 기업들의 전근대적 조직문화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원인별로 실행 아이템을 마련해 개선해나가기로 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기업문화를 혁신하려면 최고경영자(CEO)의 인식과 의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며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기업문화 개선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 집요하게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대한상의는 주요기업 CEO들을 위원으로 하는 '기업문화선진화포럼(가칭)'을 구성·운영해 기업 최고위층부터 전근대적인 기업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갈 계획이다. 또 기업문화 이슈에 대한 공감대 확산과 개선활동 참여풍토 조성을 위해 기업문화 토크콘서트를 개최해 한국형 기업문화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심층 연구하기로 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한국 기업의 조직 엔진이 매우 낡고 비과학적이며 글로벌 기업 수준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현재의 조직운영 방식으로는 저성장 뉴노멀 시대 극복도, 기업의 사회적 지위 향상도 힘들기 때문에 피처폰급 기업운영 소프트웨어를 최신 스마트폰급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행경기자 saint@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