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야근이 사라져야 한국경제 살아난다

산업계에 조직문화 혁신바람 거세
생산성 중시로 경영진 발상 바꾸고
창의·자발성으로 경제활력 키워야



국내 굴지의 그룹사에 다니던 후배를 만났더니 얼마 전 외국계 회사로 옮겼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야근에 견딜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퇴근 무렵 상사의 갑작스러운 지시로 번개 야근이 생기고 남들 눈치 보느라 동조 야근까지 해야 하는 비생산적인 근무환경이 싫었다는 것이다. 반면 새 회사의 근무환경은 충격 그 자체라는 말도 전했다. 그 흔한 보고서 하나 만들지 않고 핵심역량에만 집중하라는 말이 전부였다고 한다. 상부로부터 시시콜콜한 지시사항이나 지루한 회의가 적다는 점도 달랐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지만 능력껏 일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높아졌다는 게 후배의 전언이다.


그래서일까. 대기업들부터 조직문화 혁신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야근을 없애고 직급체계를 단순화하는 등 낡은 조직풍토를 뜯어고친다는 소식이다. 수련회는 소속감만 강조하다 보니 군대식 문화와 과도한 경쟁이 벌어져 시쳇말로 ‘토하고 싶다’는 내부 반응도 적지 않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들어가고도 조기 퇴사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가 깔려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대한상공회의소는 한국 기업들이 상습적 야근과 상명하복 등 후진적 문화에 골병이 들었다고 경고했다. 놀라운 것은 경영진들은 조직건강을 최상위 수준으로 보지만 직원들은 최하위로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위와 아래가 완전히 따로 노는 부끄러운 민낯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외국인 임원은 “한국 기업의 임원실은 마치 엄숙한 장례식장 같다”고도 비유했다. 불명확하고 불합리한 리더의 지시에도 고개만 끄덕이다 보니 뒤처리를 하느라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하는 이상한 나라라는 것이다.

정부가 나름의 노동개혁을 추진하고 있다지만 과도한 잔업과 야근부터 없애는 등 근무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야근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회사의 구체적인 직무 명령이 있을 때에만 제한적으로 근무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일벌레로 알려져 있지만 노동 생산성은 만년 꼴찌수준이다. 우리는 연평균 근로시간에서 독일에 비해 753시간이나 더 많이 일한다. 그러나 노동 생산성으로 따지면 독일이 우리의 1.5배에 이르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업무 집중도가 많이 떨어지고 번거로운 서류작업과 회의에 투입되는 낭비요인도 많다는 얘기다.

물론 당장 모든 기업들이 잔업과 야근을 없애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경비절감 차원에서 인력을 줄이다 보니 업무량이 많아지고 납품 만기가 촉박한 중소기업들로서는 한가한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야근의 주범으로 꼽히는 비효율적인 회의·보고문화부터 고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하다. 경영진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가운데 미국 조지워싱턴대의 제리 하비 교수가 제창한 ‘애빌린 패러독스’를 전하고 싶다. 교수의 장인이 어느 날 폭염에 2시간이나 멀리 떨어진 애빌린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교수의 아내가 동의했고 교수는 장모만 괜찮다면 자신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식당에 다녀온 다음 그들 중 아무도 애빌린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엉뚱한 결정이 내려진 것인데 우리 사회의 어느 조직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런 경직된 기업문화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창의적인 사고와 신사업 아이디어가 제대로 나올 리 만무한 일이다.

기업 문화는 위로부터 바뀔 수밖에 없다. 최고경영진(CEO)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건전한 조직문화를 만들어야만 조직원들의 자발적인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야근을 없앴더니 걱정과 달리 오히려 업무 효율성이 높아지는 효과를 보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위협하는 시대에 낡은 관행을 고집하다가는 경쟁에서 낙오하기 십상이다. 우리의 강점인 인적 자원의 창발성과 자발성을 높여 구조재편에 나선다면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ss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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