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숫자의 덫



꽃망울이 터진다. 총선의 계절이 왔다. 선거운동에는 사람이나 차량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화려하게 포장된 숫자들도 들러리를 선다. 숫자의 힘은 막강하다. 예산을 ‘최대한’ 끌어오겠다는 것보다 ‘120억원’ 가져오겠다는 공약은 훨씬 그럴듯하다.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숫자 조합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숫자로 내건 약속을 지키면 다행이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이명박 정부의 ‘747공약’을 떠올려보자. 연평균 7% 성장해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를 만들고 7대 경제 강국이 되겠다고 했다. 7% 성장이라니. 지난 2002년(7.4%)을 끝으로 이제 ‘불가능의 영역’으로 넘어간 숫자다.

박근혜 정부는 숫자를 뒤집어 ‘474비전’을 내세웠다. 경제성장률 4%, 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달러다. 현재 스코어는 성장률 2.6%(2015년), 고용률 58.7%(2월), 국민소득 2만7,340달러(2015년)다. 임기가 2년 남았지만 달성할 확률은 낮아 보인다.

정치인들이란 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존재라고 항변한다면 할 말은 없다. 문제는 이들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정부다.


지난주 한국은행이 발표한 1인당 국민소득 보도자료를 놓고도 뒷말이 있었다. 대통령이 국민소득 4만달러를 약속했는데 국민소득은 오히려 6년 만에 쪼그라들었다. 임기 내 3만달러 달성조차 요원하다.

이를 의식한 것일까. 한은은 보도자료 맨 앞장에 달러로만 썼던 1인당 국민소득을 올해는 원화로 먼저 쓴 다음 괄호 안에 달러를 병기했다. 달러로는 3만달러가 안 돼도 원화로는 3,000만원이 넘었다고 굳이 알린 것이다. 총선을 앞둔 상당히 미묘한 시점에 말이다.

기획재정부는 ‘3%’라는 숫자에 걸려 꼼짝도 못 하고 있다. 공약이던 4%는 진작 포기했다. 기재부의 올해 전망은 3.1%다. 국내외 전망기관들이 잇따라 올해 경제성장률을 2%대로 내리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KDI(3.0% 내외), 산업연구원(3.0%), 금융연구원(3.0%), 한국은행(3.0%) 등 정부 관련 전망기관들은 일제히 3%에 도열해 있다. 우연이라고 보기는 좀 민망하다.

숫자정치의 속살이 이처럼 뻔히 드러나는데도 정치권은 멈추지 못한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최근 총선공약으로 ‘777플랜(가계소득비중, 노동소득분배율, 중산층 비중 70%)’을 발표했다. 숫자의 덫에 걸려 정치권은 표만 탐내고 정부는 눈치만 보니 숫자로 표현 안 되는 훨씬 난해한 과제들은 뒤로 밀려나는 것 같아 걱정이다.

20대 총선에 전국의 후보들이 쏟아내는 숫자 공약 중 과연 몇 개가 열매를 맺을까. 벚꽃처럼 화려하게 폈다가 허망하게 날리면 끝인지.

이연선 경제부 차장 bluedash@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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