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알함브라...유대인 추방령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대인은 모두 떠나라. 이 신성한 땅에서!’ 1492년 3월 31일, 스페인이 내린 유대인 추방령(Alhambra Decree·알함브라 칙령)의 골자다. 시한은 7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학살) 이전까지 유대인 유랑사의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이 사건은 국제질서는 물론 세계 경제사의 흐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추방령의 명분은 종교. ‘가톨릭 신앙의 해악인 유대인을 쫓아낸다’는 구실을 내걸었다.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사악한 신앙과 음탕한 관습, 율법을 고집하며 성스러운 기독교에 해악과 오욕을 끼쳤기에 추방한다’는 명령을 접한 유대인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세상이 변했어도 스페인 왕국이 자신들을 계속 활용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스페인 왕국을 도운 유대인도 적지 않았다.

스페인의 생각은 달랐다. 무엇보다 자신감에 넘쳤다. 해가 바뀌자마자 이베리아반도(스페인땅)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몰아낸 상황. 좌고우면할 게 없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북부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에게 이베리아반도를 통째로 내준 게 서기 711년. 야금 야금 실지(失地)를 회복해 무려 781년 만에 완전히 땅을 되찾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영예까지 받은 스페인(실은 페르디난도 2세와 이스벨라 여왕의 정략결혼으로 탄생한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연합왕국)은 기독교 정복자로서 이교도 색출과 추방에 전력을 기울였다.

종교적 열망을 앞에 세운 추방령 뒤에는 경제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전장을 누벼온 기사들을 포상할 땅과 재화를 돈이 많은 유대인에게서 빼앗자는 것. 알함브라 칙령에 딸린 단서 조항이 그 증좌다. 스페인은 칙령에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유대인은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나라 바깥으로 반출할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하면서도 ‘금과 은, 화폐를 비롯해 국가가 정하는 품목은 반출을 금지한다’는 부칙을 달았다. 금과 은, 보석은 물론이고 ‘국가가 정하는 품목’의 반출 금지령은 약탈의 다른 이름이었다.

집과 농지 같은 부동산을 들고 갈 수도, 그렇다고 매각한 대금을 금화나 은화로 바꿀 수도 없었던 유대인들은 결국 재산을 모두 잃고 스페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추방 당한 유대인은 얼마나 됐을까. 5만 가구에 25만명이 정설이지만 10만명에서 80만명까지 해석이 다양하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이 바로 스페인이었다는 점이다.*

유대인을 추방한 스페인은 경제가 펴졌을까. 천만에. 그 반대다. 경제가 휘청거렸다. 유대들이 한꺼번 땅과 집이며, 금과 은, 보석을 헐값에 내놓고 반출이 가능한 옷가지나 식량을 사들였으니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같은 해 10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에서 은이 쏟아져 들어오며 물가 상승세는 현상으로 굳어졌다. 스페인 제국은 16세기 이후 물가 상승에 시달렸다.


가장 심각한 큰 문제는 전문 인력 부족. 유대인이 맡아온 행정과 상업을 대신할 인력이 없었다. 유대인 추방 뒤에는 농업을 담당해온 이슬람 교도까지 쫓아내 스페인 제국은 안에서 멍들어갔다.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공을 세우지 못한 젊은이들은 일확천금을 꿈을 안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뿐, ‘근면한 노동=무능력’으로 간주되는 사회 풍토 속에서 내실 있는 성장은 애초부터 물 건너 갔다. 온갖 전쟁을 마다하지 않고 끼어든 국가적 호전성 역시 스페인을 벼랑으로 밀었다. 신대륙의 원주민을 강탈한 막대한 금은보화를 들여오고도 스페인은 끝내 세계사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추방 당한 유대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스페인계 유대인, 즉 세파르딤(Sephardim)의 30%는 이때 굶어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살아남은 자들의 주류는 크게 두 가지 경로를 밟았다. 가장 많은 유대인을 받아준 나라는 오스만 튀르크. 오늘날 모로크와 알제리 지역을 비롯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에도 수만명이 건너갔다. 추방 유대인이 이슬람 국가들에 많이 정착했다는 사실은 유대인에 대한 이슬람의 관용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두 번째 집단은 인접국가인 포르투갈을 택했던 사람들로 1인당 1두가트에 해당하는 금이나 물품을 내고 포르투갈을 정착지로 삼았다. 활발한 해양 탐구와 식민지 개척으로 돈이 궁했던 포르투갈은 돈 때문에 유대인을 받아들였으나 얼마 안지나 종교적 이유로 스페인의 뒤를 따랐다. 포르투갈을 떠난 유대인들의 다음 행선지는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종교적 관용이 있었던 네덜란드는 마침 황금기를 맞던 시기여서 유대인들에게 각종 기회를 안겨줬다, 평생을 곤궁하게 생활했으나 학문적으로는 대성했던 스피노자도 이런 경로를 밟았던 유대인의 후손이다.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은 영국의 명예혁명과 함께 대거 잉글랜드로 이주해 새로운 세상에서 꿈을 펼쳤다. 경제학자 리카도와 영국 총리를 지낸 벤자민 디즈레일리 등의 조상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또는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에 유입된 세파르딤(스페인계 유대인)이다.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은 위장 개종을 통해 눌러앉았던 5만여명의 유대인. 알함브라 칙령에 명시된 대로 ‘추방 기한 이후에도 머물러 있거나 되돌아오는 유대인, 잠시라도 방문하는 유대인은 통상적 법 집행 절차 없이 극형에 처한다. 그 재산은 국고에 귀속된다’는 으름장대로 계속되는 색출작업에 사로 잡혀 처형 당하거나 마땅한 선박도 없이 탈출하다 바다에 빠져 죽었다.

만약에 스페인 제국이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들을 추방하지 않았다면 역사를 어떻게 흘러갔을까. 편협한 종교 이데올로기가 대중의 광적인 열광을 이끌어내고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은 포퓰리즘에 근거한 권력의 을 공고히 다졌는지 모르겠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잘못 쌓거나 설계가 부실한 성은 잠시 화려할 수는 있어도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524년 전 유대인 추방령이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려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신념과 종교, 나라와 피부, 학교와 고향이 다르다고 마음 속에서 누구를 차별하거나 추방한 적은 없는가.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유대인이 스페인에 많았던 이유는 세 가지로 풀이된다. 첫째, 스페인 지역은 로마가 가장 먼저 식민화하고 본토와 같이 대우한 곳이어서 유랑 민족에게도 기회가 많았다. 두 번째 이유는 구약성서와 연관이 있다. 유대 국가가 멸망할 즈음 유대인 랍비들이 구약성서의 12예언서 가운데 하나인 오바댜서 1장 20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스바랏으로 잡혀갔던 사람들은 남쪽 유다의 성읍을 차지할 것”이라는 구절의 ‘스바랏은 바로 에스파냐 지역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갈 꿈을 안고 모여든 것. 세 번째 이유는 이슬람의 관용에 있다. 로마 멸망한 이 지역에 들어선 서고트 왕국에게 박해받았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지배자인 이슬람 왕국으로부터는 차별받지 않았다. 심지어 고위 공직자까지 배출했었다. 그라나다 왕국의 군대의 총사령관도 한때 유대인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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