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유덕장의 묵죽도 6곡병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
연녹색 새잎이 막 나기 시작한 신죽(新竹)이요, 바람을 맞고도 버티고 이겨내는 풍죽(風竹)이다. 오래된 굵은 대나무에서 한결 더 날카로운 잎이 돋아난 것은 통죽(筒竹)이고, 희뿌연 안개 너머로 운치를 더한 것은 연죽(煙竹)이다. 빗방울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우죽(雨竹)은 비를 맞아 댓잎이 아래로 처졌고, 설죽(雪竹)은 소복한 눈을 잎사귀마다 얹고 있다. 탄은 이정, 자하 신위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히는 수운 유덕장이 그린 대나무 그림이 6폭 병풍으로 걸렸다.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 내 포스코미술관이 기획한 ‘사군자, 다시 피우다’는 기개 꼿꼿한 대나무 그림으로 시작한다. 탄은 이정의 것으로 전하는 ‘묵죽도’도 나란히 놓였다.
표암 강세황의 ‘사군자도’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은 사군자를 한 폭에 모아 그렸다. 흔히 매난국죽(梅蘭菊竹)이라 부르지만 표암은 난초,매화,대나무,국화 순으로 그렸다. 자신 있고 좋아하는 화재(畵材)부터 그린 모양이다.눈여겨볼 명품은 추사 김정희의 ‘시우란(示佑蘭)’이다. 제주도 유배 중이던 추사가 자신을 보필하던 아들 상우가 그림에 재주가 있어 난초 그리는 법을 몸소 보여준 작품이다. “난초를 그릴 때는…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게 된 뒤에야 남에게 보여줄 만하다. 열 개의 눈이 보고 열 개의 손이 지적하는 것과 같으니 마음은 두렵도다”고 적은 글은 선비정신과 더불어 가장 훌륭한 스승은 스스로 실천하는 부모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2014년 6월 경매에서 10억4,000만원에 낙찰됐던 작품이다.
추사 김정희 ‘시우란’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
추사의 아들 사랑 옆에는 다산 정약용의 딸 사랑이 ‘매화병제도’에 담겼다. 다산이 전남 강진으로 귀양올 때만 해도 어렸던 딸이 십 수년 못 본 사이 장성해 시집을 가게 되자 애틋한 마음을 매화 그림과 시로 적었다. 부인 홍씨가 결혼 30주년을 맞아 시집올 때 가져온 붉은 치마 6폭을 유배지로 보냈고 다산은 이를 아들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적은 ‘하피첩’과 이 그림으로 남겼다.매화 차와 매화 술만 마실 정도로 매화 사랑이 지극했던 우봉 조희룡이 홍매를 그린 ‘매화도’는 연분홍 꽃 도 곱지만 승천하는 용을 방불케 하는 오래 묵은 매화 둥치가 인상적이다. 대나무기 직선미, 난초기 곡선미라면 매화는 굴곡미가 으뜸이라 한다.
우봉 조희룡 ‘매화도’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
조선부터 현대까지 작가 32명의 77점을 엄선한 자리라 어느 작품 하나 놓치기 아깝다. 2012년부터 진행해 온 ‘미술로 보는 인문학’ 시리즈의 일환으로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윤희 선임큐레이터는 “사군자는 동양정신의 뿌리이자 예술의 기본”이라며 “선현들은 이름없는 풀포기를 보고도 이상을 꿈꾸고 군자를 품었으니 현대인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되짚어 보는 기회이길 바란다”고 말했다.크게 3부로 나뉜 전시는 1부 선비정신에 이어 2부에는 저항정신의 표상으로 사군자를 그렸던 일제 강점기 일명 ‘지사(志士)화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3부는 청전 이상범, 남천 송수남부터 문봉선까지 현대작가를 조명한다.
전시장 출구 오른쪽에는 근대 묵죽화에서 첫 손으로 꼽히는 해강 김규진의 ‘설죽 10폭 병풍’이, 왼쪽에는 현대미술가 조환이 철판으로 만든 대나무 작품이 서로 마주보며 관람객을 배웅한다. 진짜 대숲에라도 들어앉은 듯 숨통이 열린다. 5월 25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해강 김규진 ‘설죽 10폭병풍’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