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내려놓고 연기 도전하는 판사들

'여보 고마워' 상연 앞두고 오디션
능청스러운 재치에 잇달아 폭소
"연극으로 사람들 치유 돕고싶어"
내달 20일부터 2달간 선봬

박건창 서울가정법원 판사가 지난 2일 양재동 서울가정법원 청연재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연극 ‘여보 고마워’에 출연할 판사를 뽑는 공개 오디션에서 연기하고 있다.


“얼굴이 별로라고? 그럼 고치면 되잖아!”

부부싸움 상황을 가정한 즉석 연기에 도전한 남현(41) 서부지법 판사가 아내 역을 맡은 심사위원이 “당신 얼굴이 못나 싫다”고 몰아붙이자 내놓은 애드리브다. 남 판사의 재치에 심사위원과 오디션 참가자들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2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가정법원에서는 다음달 대중 앞에 선보일 연극 ‘여보 고마워’ 에 배우로 나설 판사를 뽑는 오디션이 열렸다.

오디션에 참가한 판사들이 권위를 내려놓고 엄숙한 법정에서는 드러내지 못했던 끼를 마음껏 분출했다.

이수주(34) 인천가정법원 판사는 “특기나 장기가 있으면 자유롭게 보여달라”는 주문에 고전동화 ‘빨간 모자’의 소녀 연기를 유창한 중국어로 선보여 박수를 받았다. 최고령 참가자인 이화용(49) 의정부지법 판사는 개그맨 고(故) 이주일씨의 ‘콩나물 팍팍 무쳤냐’라는 유행어를 능청스레 성대모사 하기도 했다.


김용희(38) 평택지법 판사는 프로 배우 못지않은 연기력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그는 실제로 여러 연극·영화에 출연해 2006년 강원연극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연기상을 안겨줬던 극단 굴레의 연극 ‘미라클’의 ‘식물인간 영혼’ 역할을 재연하자 심사위원들은 “왜 판사를 하느냐. 극단에서 다시 일해보자”며 극찬했다.

연극 무대에 서기 위한 판사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통영지법에 근무하는 정혜승(31) 판사는 심사위원이 “연극에 출연하면 매번 서울까지 4시간 넘게 걸려 올라와야 하는데 괜찮냐”고 묻자 “살면서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이어서 연극 무대에 설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말했다.

이화용 판사는 늦은 나이에 연극 무대에 서는데 문제가 없느냐는 질문에 “요즘 들어 가족의 소중함을 많이 느끼고 있는데 이혼 가정의 아픔을 그린 연극 내용에 크게 공감했다”며 “연극으로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연극 ‘여보 고마워’의 집필자이자 이날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고혜정 작가는 “판사들이 끼가 너무 많아 몇몇 분은 제 작품에 섭외하고 싶을 정도”라며 놀라워했다.

연극은 평범한 부부가 이혼 위기에 봉착하지만 남편의 병마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판사들은 극 중에서 이혼 부부의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 역을 맡아 연기한다.

연극을 주최하는 대법원 산하 부모교육연구회는 “‘이혼·가정불화 사건을 경험한 판사들이 작품을 통해 가족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자연스레 전달하면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해 판사의 배우 출연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연극은 오는 5월20일부터 7월2일까지 서울 문화일보홀에서 상연된다. 공연시간은 일요일 오후3시30분, 그 밖의 요일은 오후7시다. 합의 이혼을 앞둔 부부에게 관람 기회가 우선 제공된다. 오디션 합격자는 다음주께 결정될 예정이다. /글·사진=박우인기자 wipark@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