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선을 보인 시기는 1965년 4월 4일. 기본 성능과 기체 형상이 공개됐을 때 그 혁신적 설계 때문에 세계가 놀랐다. 최대 특징은 삼각형 텔타익에 작은 앞날개(카나드)를 붙인 더블 델타(double Delta). 일각에서는 ‘복엽 제트기’라고 비웃었으나 운동성이 좋아지고 이착륙 거리가 짧아졌다. 성능도 뛰어났다. 최고속도 음속 2.1배. 기체 크기는 지금도 한국 공군이 운용하는 F-5 제공호와 F-4 팬텀의 중간 정도였으나 무장 탑재량은 F-5의 두 배에 이르렀다.
우수한 성능에 각국이 도입을 추진했지만 해외 판매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과 프랑스 등이 정치적 영향력을 내세워 시장을 과점한 탓이다. 결국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됐음직한 성능에도 1995년까지 생산분은 스웨덴 공군용 329대에 그쳤다. 인도가 대규모 발주를 계획했어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엔진 원천기술을 제공한 미국의 수출 거부 때문이다.
한국과 인연도 있었다. 산업자원부 차관보 출신인 김홍경 전 한국항공우주산업 사장의 회고. 상공부(현 산업자원부)의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그에게 국·과장은 물론 장관에게도 알리지 말고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청와대 제 2경제수석실이 조직한 태스크포스는 ‘한국 상황에 가장 적합한 전투기는 비겐’이라는 중간 보고를 올렸다. 비화(秘話)는 여기까지가 끝.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이후 작업이 속개되지 않았다. 새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실무자들이 추천했던 비겐 대신 미국제 F-5 E/F 기종을 골랐다.*
비겐을 단 한 대도 수출하지 못한 스웨덴 항공산업은 위축됐을까. 그 반대다. 비겐의 후속 전투기인 샤브 JAS-39 그리핀은 체코·헝가리·남아프리카공화국·태국·영국 등지에 판매 또는 임대되는 실적을 거뒀다. 브라질이나 인도에서의 같은 대규모 수요도 대기 중이다.
역사가 반복된다고나 할까. 노스롭의 F-5 E/F와 스웨덴 초음속기가 맞붙는 시장이 다시금 다가오고 있다. 무엇보다 사브사가 미국 보잉사와 제휴해 미 공군의 차기 훈련기(TX)선정 경쟁에 끼어들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사활을 걸고 있는 TX 사업에는 샤브사 뿐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경쟁자도 나타났는데 그 기종은 바로 미 공군의 현역 훈련기인 T-38. 한국 공군의 제공호(F-5 E/F)와 뿌리가 같은 기종이다. F-5 E/F의 원제작사인 미국 노스롭사는 T-38기의 수명을 연장하거나 F-5 E/F의 최종 진화판인 F-20을 차기 훈련기의 베이스로 삼을 계획으로 알려졌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神), 토르가 휘두르는 망치에서 나오는 천둥이라는 뜻을 지닌 비겐 전투기는 마케팅에서 실패했으나 걸작 전투기의 하나로 손꼽힌다. 인구라야 천만명 남짓한 스웨덴이 명품 전투기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중장기 비전. 설계 개념과 형체 공개는 1965년이지만 구상은 1950년대 중반에 나왔다. 시제기의 처녀 비행은 1967년, 생산은 1971년, 본격적인 생산은 1974년에 시작했을 정도로 스웨덴은 장기적이고 치밀한 계획에서 전투기 사업을 펼친 게 비겐이라는 걸작을 낳았다.
두 번째 이유는 미국의 전폭적인 기술 지원. 미국제 엔진의 면허생산은 물론 개조와 셜계 변경에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았다(비겐 전투기가 짧은 이착륙 거리를 갖게 된 이유는 미국제 엔진에 스웨덴제 역분사 장치를 장착한 덕분이다). 세계최초의 전투기용 임무컴퓨터인 ‘CK37 컴퓨터’의 기술도 미국이 지원한 것이다. 미국은 왜 기술을 줬을까.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소련 북해함대를 감시하려면 스웨덴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해 좌파 정부가 초장기집권하는 스웨덴에도 고급 기술을 마구 넘겨줬다.
세 번째는 스웨덴 자체의 기술력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르네 라코마’라는 엔지니어는 이미 ‘전설적인 항공기 설계자’로 이름이 높았고 미국제 엔진을 자유자재로 뜯어보고 개조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기초 기술력을 갖고 있었기에 미국이 지원하는 기술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스웨덴의 사브 37 비겐 전투기를 오늘날 시점에서 재조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산비용까지 합치면 유사 이래 최대라는 18조 원의 예산이 투입될 한국형 차기 전투기(KF-X)가 순항할 수 있을까. 중장기적인 비전과 치밀한 준비가 우리에게 있는가. 앞으로 10년 뒤에는 무조건 KF-X가 비행한다는 청사진만 있을 뿐이다. 미국도 기술제공은커녕 약속했던 기술마저 감추는 형편이다.
국내 기술 수준 역시 당시의 스웨덴과 비견하기 어렵다. 이제라도 비겐의 성공 요인과 우리의 여건을 하나 하나 따져보는 자세가 필요해 보이건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문제를 제기하면 관련 당국은 미국을 변호하기에 급급하고 국민들의 불신은 커져만 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당장 지금은 숨고르기 국면으로 느껴지지만 수면 밑에서는 파장이 거세지는 분위기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한국 공군이 최초로 자체 제작한 제트 전투기를 갖게 된 시기는 1982년 9월. 제공호를 생산하면서부터다. 제공호는 미국 노스롭사의 F-5E/F 전투기를 조립 생산한 기종. 면허생산도 아니고 단순히 부품을 들여와 조립한 제공호를 두고 전두환 정권은 대대적인 대 국민 홍보를 펼쳤다. 세계 최신예기를 생산하는 쾌거를 이뤘으며 아시아에서 일본 중공에 이어 세번째 항공기 생산국이 됐다고 강조했으나 모두 거짓말이었다.
한국 공군이 요즘도 운용 중인 제공호는 당시에도 세계 최신예기 근처에 못 갔다. 애초 개발 당시부터 이 전투기는 2선급이었다.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수출용으로 생산됐을 뿐, 미 공군이나 해군은 사용한 적이 없다. 훈련용으로만 쓰고 있을 뿐이다. 1979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고마움의 표시로 ‘F-5E/F를 공여하겠다’고 제의하자 사다트가 “구닥다리 5등급 항공기”라며 이를 거부한 사례가 유명하다. 이집트가 5등급이라고 혹평했던 전투기가 3년이 지난 뒤 한국에서는 ‘세계 최신예 전투기’로 둔갑한 셈이다.
‘아시아 세 번째 제트 항공기 생산국’도 어림없는 얘기였다. 이스라엘은 이미 1970년대에 프랑스의 미라쥬 전투기 설계도를 훔쳐내 ‘크피르’전투기를 생산하고 인도 역시 수차례 제트기를 연구, 생산한 적이 있다. 한국이 82년부터 F-5E/F를 68대(단좌형 48기, 복좌형 20기) 생산하기 앞서, 대만은 1974년 10월부터 308대의 F-5E/F를 생산했다. 특히 대만의 후기형은 기수 부문이 F-5G(후에 F-20 타이거샤크로 이름이 변경)와 형상이 비슷해 발달형 기체라는 추측을 낳았었다. 5공 정권은 뻔한 사실마저 거짓으로 홍보해 외국, 특히 일본 언론의 비웃음을 샀다.
** F-20은 미국 노스롭사가 F-5 E/F를 기반으로 개발한 전투기로 형상은 F-5 E/F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성능을 자랑했다. F-16 전투기와 외국 시장을 놓고 경쟁하던 F-20의 노리던 주요 시장은 F-5 E/F의 대량 운용국가인 대만과 한국 등이었으나 1984년 10월 수원비행장에서 시험 비행 중 전두환 대통령이 참관하는 가운데 추락하고 말았다. 캐나다 등지에서도 추락이 잇따라 결국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았으나 최근 TX의 후속기종으로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