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진짜 갑질은 '을'이 한다?

진짜 갑질의 주범은 바로 또 다른 을들이다. /사진=이미지투데이


갑을 관계라 함은 흔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일컫는 말이다. 한쪽이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는 구조를 이야기한다. 서로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정한 거래가 그만큼 쉽게 일어난다. 사회면을 채우는 수많은 기사들 중 상당수가 갑을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갑을 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쪽은 을일 수밖에 없다. 을은 늘 갑의 부당함을 견디고 참아내는 약자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을이라도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절대 갑’과 ‘불쌍한 을’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을 관계의 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을 안에도 수많은 등급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온 힘을 다해 을이라도 되고 싶은 절박함을 당신들(갑들)은 모른다.” JTBC 드라마 ‘욱씨남정기’에서 남정기 과장(윤상현)의 나래이션이 수많은 을을 울렸다. 불공정한 계약이라도 체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간절함은 자존심을 세우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이 시대 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을의 반란은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부당한 요구를 받았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거나 면전에서 거절하는 ‘쿨한 을’의 모습을 목격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지르는 순간’에야 기분은 풀리겠지만 이내 ‘먹고 사는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굴종적 계약 조건을 강요하는 갑을 관계를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하는 건 을이 자생하기 힘든 환경 탓이 크다. 유통망을 구축하거나 대규모 판촉행사를 시행하거나 하는 모든 일들이 ‘자본력’에 달렸기 때문이다. 갑과 함께 해야만 살 길이 생기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같은 회사 내에도 갑을 관계는 존재한다.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이 대표적이다.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부하직원 또는 후배의 성과를 본인 공으로 돌리고, 본인에게 한없이 관대하지만 후배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는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갑을 관계에서 이토록 무자비한 갑의 횡포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을의 진짜 적은 갑이 아니라 또 다른 을이다.

을이 용기 내 부당함을 지적하면 동료들은 박수 쳐줄까? 전혀 아니다. 냉소 섞인 비난을 보낸다. 갑을 관계에서 을이 서러운 건 당연한 데 괜히 일을 크게 만든다고 말이다. 직장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소한 여직원이 부당하게 해고되거나 동료들의 따돌림으로 스스로 회사를 그만뒀다는 뉴스를 떠올려보자. 고통을 십분 이해해 주던 동료들은 일이 커지면 ‘왜 저렇게 유난을 떠느냐’며 180도 태도를 바꾸곤 한다. 혹시 잘못 엮여 나에게 피해가 돌아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기 때문이다. 갑은 영원한 갑이요, 을은 을일수 밖에 없을 거라는 자조 섞인 반응인 셈이다.

‘사이다 같은 을’이 나타나기를 응원하면서도 막상 주변에서 등장하면 안면몰수하고 마는 새가슴이 을을 영원한 을로 남게 만드는 건 아닐까. 진짜 갑질은 또 다른 을이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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