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5A38 만파
10여년 전 그리스에 출장 갔을 때 일이다. 오후2시가 넘은 시각에 아테네국제공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서는데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지나는 길에 보인 집들도 대부분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쳐 있어 적막감이 들 정도였다. 우리나라 같으면 사람들로 북적거릴 시간인데도 한적한 것이 의아해 동승한 가이드에게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시에스타(siesta·낮잠) 때문”이라는 것.
말로만 듣던 남유럽의 낮잠 풍경이 이런 분위기구나 하면서 차창 밖을 더 유심히 살펴봤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리스·스페인·이탈리아 등의 지중해 연안국이나 라틴 문화권 나라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런 낯선 경험을 해봤지 싶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이들 나라에서 시에스타는 일종의 관습이자 풍습이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이른 오후에 두세 시간씩 낮잠을 즐긴다. 농경시대 농부들이 한낮 태양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생겨나 관행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시에스타 시간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리스는 오후2~4시, 스페인은 1~4시, 이탈리아는 오후 1~3시30분으로 알려져 있다. 낮잠에 빠져들면 상점·은행이 일제히 영업을 중단하고 관공서, 심지어 TV 방송조차 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경제 여건이 어려워진 탓인지 스페인에서 시에스타까지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될 모양이다.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가 최근 시에스타 관습을 없애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는 외신보도다. 독일 등과 근무 시간대가 맞지 않아 불편한데다 퇴근 시간이 늦다고 해 생산성이 높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 주된 이유다.
통상 스페인 근로자들은 낮잠을 즐긴 후 업무에 복귀해 오후8시에 퇴근한다. 라호이 총리는 “오후6시에 근무를 확실히 끝낼 수 있도록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겠다”고 강조했다. 반대 여론도 많아 결과를 예단하기는 이르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시에스타도 존폐의 기로에 선 것 같다. /임석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