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형 율촌 고문
국가별로 발표되는 가계동향 자료를 보면 지출하고 남는 돈을 저축하는 저축률이 매우 상이하다. 미국의 저축률은 약 5% 수준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매우 낮다. 과연 그럴까. 미국 같은 선진국들 가계의 지출항목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이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미국은 주택 구입시 ‘모기지론’이라는 제도를 활용한다.
우리나라의 주택담보대출과 비슷한 제도인데 주된 차이점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금융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원금의 상환을 유예해주고 반면에 이자만 받는 방식이지만 모기지론은 대부분 첫 달부터 원금 및 이자를 같이 갚아 나간다는 점이다. 다만 원금을 균등분할 상환하게 되면 초기 이자 부담이 과중하다는 점을 고려해 처음에는 상환하는 원금을 적게 하고 모기지 만기에 가까워질수록 원금 상환비율을 높인다. 따라서 전체적인 상환액, 즉 원금 및 이자 부분의 합계가 첫 달부터 모기지 상환 만기시인 예컨대 30년 뒤까지 같게끔 설계돼 있는 점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 모기지 금액은 가계동향 항목에서 저축이 아닌 ‘지출’로 분류된다는 점이 주목할 대상이다. 이밖에 교육비와 의료비 등도 차이가 있다. 선진국일수록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무료로 지원된다. 따라서 높은 세율을 감당하는 대신 각 가정이 별도로 저축할 필요가 없는 반면 선진국이 아닌 나라에서는 이러한 교육과 의료를 대비한 저축이 높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세금·저축·주거·교육 및 의료비용을 합하면 나라별로 대부분 총소득의 50%가량 비슷하게 지출된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를 적용하면 사실상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높은 저축률도 주택 구입에 따르는 목돈이나 나날이 높아지는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한 일종의 ‘강제저축’일뿐, 그 내용 면에서는 미국의 ‘모기지 지출’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가계대출은 왜 이토록 많은 것일까. 우리나라의 1,200조원대 가계 부채 대부분은 가계대출이며 가계대출의 절반가량은 주택담보대출이 차지하고 있다. 즉 과도한 가계부채의 주요인은 주택담보대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우리나라의 경우 가처분소득 대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훨씬 많은 대출을 받게 만드는 주요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자만 받고 원금의 상환을 계속 유예시켜주는 지나치게 관대한 주택금융에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이러한 금융 관행이 주택가격 상승과 맞물려 기형적인 액수의 가계대출로 연결돼 지금은 어찌 손쓰기가 힘든 형국까지 이어진 것이다.
주택가격이 올라가는데 이자만 갚을 수 있다면 빌릴 수 있는 것과 처음부터 원금까지 같이 상환해야 하는 제도 중 어느 것이 부담이 적겠는가. 현재 우리나라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이자만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정상여신’으로 분류한다. 과연 그럴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원금을 함께 상환해나가는 미국 금융기관이 외견상 ‘정상여신 비율’과 상관없이 내용 면에서 우리나라 은행들의 여신에 비해 훨씬 안전할 것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