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가 후원해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인 5~8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팔라초 콘타리니폴리냐크에서 열린 ‘단색화’ 특별전. /사진제공=국제갤러리
‘단색화’가 한국 미술시장을 살렸다.
해외 아트페어를 중심으로 단색화 열풍을 선도한 국내 최대 화랑인 국제갤러리가 연매출 ‘1,000억원’을 처음 돌파했고 양대 경매회사인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은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단색화는 지난 1970년대 국내 화단의 주류였던 ‘한국의 모노크롬(단색조) 회화’를 가리킨다.
12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국제갤러리의 지난해 매출액은 1,123억여원이었다. 2014년 매출 613억원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급증했다. 35년 전통의 국제갤러리가 2008년부터 금융감독원에 감사보고서를 제출해온 이래 연매출 1,000억원 이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업이익도 사상 처음 100억원을 넘겨 198억원을 기록했다.
양대 미술품 경매회사인 서울옥션의 지난해 매출은 547억원, 케이옥션은 152억원으로 두 회사 모두 전년 대비 2배 이상 매출 신장을 보이며 최대 실적을 이뤘다. 영업이익도 서울옥션 150억원, 케이옥션은 52억원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지인 홍콩 경매의 성공이 결정적이었다. 서울옥션은 1998년 설립 이래 처음으로 낙찰총액 ‘1,000억원’을 넘기며 연간 1,078억원어치를 낙찰시켰는데 이의 절반 이상인 60%가 홍콩에서 이룬 성과였다. 케이옥션은 지난해부터 대만·일본 등 해외 경매사와 연합하지 않고 단독으로 총 4회의 홍콩 경매를 진행해 낙찰률 90%에 육박하는 성공을 거뒀고 2005년 창사 이래 최대치인 678억원의 낙찰액을 기록했다. 경매사의 활약에도 ‘단색화 열풍’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발표한 지난해 국내 경매사 낙찰총액 1,880억원 가운데 단색화가 59%를 차지하며 시장을 주도했다.
◇국제갤러리 ‘천억신화’=국내 ‘톱3’ 화랑인 국제·현대·가나아트갤러리 중 ‘천억신화’의 깃발은 국제갤러리가 맨 먼저 꽂았다. 국내 미술시장 규모가 연간 4,000억원 수준으로 추정되고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최근 발간한 ‘2015 미술시장 실태조사’에서 시장 규모를 2014년 연간 거래액 기준 3,496억원으로 발표한 것과 비교하면 ‘천억’의 비중은 상당하다. 특히 이번 결과는 국제갤러리가 주도적으로 해외 신규 시장을 개척한 결과인 ‘단색화 열풍’과 밀접한 까닭에 더욱 의미가 있다.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장기 불황에 빠져 있던 국내 미술시장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1970년대 한국 화단을 주도한 단색화에 주목했다. 단색화는 정신수양에 가까운 반복적 행위로 화면을 구성하는 게 특징인데 이는 한국의 선비정신·근면성실과도 일맥상통해 조형성뿐 아니라 정신성에서도 공감을 얻어 한국 현대미술의 브랜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 회장은 미술사적 가치에 비해 시장의 평가는 낮았지만 서구 미술계가 먼저 알아본 ‘구타이’ 등 일본 미니멀아트의 성공을 벤치마킹했다. 국제는 2013년 5월 뉴욕과 9월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아트페어에서 단색화 거장들을 처음 소개했고 이는 해외 미술관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후 스위스 아트바젤 등 세계 주요 아트페어에서 정창섭·박서보·정상화·하종현·권영우·김기린·이우환 등 꾸준히 단색화를 소개한 국제는 거듭 ‘솔드아웃(매진)’을 이뤄냈다. 2014년 9월에는 대규모 단색화 전시를 갤러리 전관에서 열어 ‘단색화 열풍’을 국내로 역수입했고 지난해 5월에는 세계 최고 미술행사인 베니스비엔날레의 병렬전시로 기획된 ‘단색화’전을 후원했다. ‘미술 한류’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선 국제갤러리는 지난해 해외전시 비용으로만 32억원을 쏟아부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이현숙 회장은 지난해 말 문화예술발전유공자로 문화훈장을 수훈했고 해외 언론의 조명도 받았다.
업계 관계자들은 “4,000억원이 안 되는 국내 미술시장에서 연매출 1,000억원은 ‘신화’이자 시장의 파이가 커질 것을 예고하는 수치”라며 기대를 보이고 있다. 앞서 ‘갤러리서미’가 2007년과 2010년에 1,000억원 이상의 압도적 매출을 기록한 바 있으나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이 화랑은 비공개 전시 등 폐쇄적인 운영에다 홍송원 대표가 대기업 비자금 사건 때마다 거듭 연루된 까닭에 미술시장의 일반사례로 볼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또 천안에 본사를 두고 서울·제주 등지에 갤러리와 미술관을 운영하는 아라리오는 백화점 등 다양한 유통사업을 겸하고 있어 일반 화랑으로 집계하기 어렵다.
◇경매회사 ‘최대실적’=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은 한국 미술시장이 호황을 누리던 2007년의 영광을 되찾은 동시에 당시 실적을 앞질렀다. 양사 모두 “홍콩 경매에서 거둔 성공이 매출 신장에 결정적”이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홍콩 경매의 구심점 역시 단색화였다. 서울과 홍콩을 오가며 경매를 진행한 김현희 서울옥션 경매사 겸 총괄팀장은 “단색화 열풍의 주역인 박서보·정상화·윤형근·하종현 4인의 국내 경매 총액을 보면 2014년 50억원 수준에서 지난해 323억원으로 급증했고, 특히 이들의 홍콩 경매 총액은 2014년 17억원에서 1년 사이 274억원으로 16배나 늘었다”고 말했다. 해외발 ‘단색화 열풍’은 국내 경매사뿐 아니라 해외 경매사도 달궜다. 세계 최대 경매회사인 소더비와 크리스티의 홍콩 경매에서 거래된 이들 단색화 주요 작가의 낙찰 총액은 722만홍콩달러에서 1년 만인 지난해 5,515만홍콩달러로 7.6배나 급등했다. 이처럼 단색화에 외국 컬렉터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스레 한국 미술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그 결과 단색화를 태동시킨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도 제대로 재평가되고 있다. 김환기의 작품은 지난해 10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7억2,100만원에 낙찰돼 최고가 기록을 세운 뒤 6개월 만인 4일 또다시 홍콩에서 48억6,750만원으로 기록을 경신했다. 두 번 모두 낙찰자는 외국인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시장 회생이 특정 화풍으로 집중되고 소수의 화랑과 경매 중심으로 쏠림현상이 심각한 데 대해 우려를 표하며 “국제갤러리가 단색화의 새로운 시장을 선도했듯이 새로운 작가와 작품군을 발굴해 균형 있는 시장발전을 모색할 때”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화랑가에서는 ‘민중미술’이나 ‘한국 초기 아방가르드’ 등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가군의 시장 재평가 움직임이 이뤄지고 있으며 경매회사 또한 기존에 거래되지 않던 이른바 ‘비엔날레 작가’ 등 신규 아이템 발굴에 애쓰고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지난 2014년 6월 스위스 아트바젤에서 단색화를 집중적으로 선보인 국제갤러리 부스의 전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