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 정체에 직면한 싱가포르가 ‘깜짝’ 통화완화에 나섰다. 올해 1·4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제로’ 성장에 그치자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이 재빨리 글로벌 통화완화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시장에서는 글로벌 경기둔화 우려에도 상대적으로 준수한 성장세를 보여온 싱가포르마저 성장 정체를 이유로 완화정책으로 돌아선 것이 다른 아시아 국가의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14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MAS가 이날 통화정책 정례회의 후 성명을 통해 “통화 바스켓 대비 싱가포르달러의 환율 절상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고 전했다. 이는 싱가포르달러의 환율 절상을 ‘완만하고 점진적으로 유지할 것’이라고 밝힌 기존의 정책기조에서 통화완화 정책으로 급선회한 것이다. 관리변동환율제를 채택한 싱가포르는 통화 바스켓 대비 싱가포르달러의 절상·절하폭을 설정해 자국 통화의 가치를 조절한다.
MAS의 통화완화책으로 싱가포르 통화가치는 급락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오후4시 현재 싱가포르달러는 미국달러당 1.3657싱가포르달러로 전일 대비 약 1% 평가절하됐다. 이는 지난해 11월 이래 최대 낙폭이다.
싱가포르가 통화완화로 정책 방향을 바꾼 것은 올해 들어 중국 경기둔화 등의 여파로 경제성장이 멈췄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날 싱가포르 통상산업부는 1·4분기 GDP 성장률이 연율 기준으로 전분기 대비 0%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블룸버그는 싱가포르의 제조업은 18.2%, 건설업은 10.2%라는 높은 성장세를 보인 반면 서비스업이 위축되면서 경제성장의 발목이 잡혔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 서비스업 성장률은 -3.8%로 7.7%였던 전 분기에서 크게 후퇴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날 MAS도 성명에서 “올해 싱가포르 경제는 지난해 10월 정책 검토 당시의 전망치보다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정책 변화의 이유를 밝혔다.
시장 전문가들은 MAS가 경제 성장 정체를 이유로 통화완화 정책을 도입한 만큼 앞으로 성장률 둔화가 지속될 경우 추가 완화책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쿤 고 호주&뉴질랜드뱅킹그룹 선임 외환투자전략가는 “MAS의 완화 행보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며 “성장세 및 물가상승률 우려가 지속될 경우 다음 통화정책 정례회의인 10월에도 완화 정책이 추가로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해 비교적 견조한 경제 성장세를 보여온 싱가포르의 갑작스러운 통화완화 정책 발표가 아시아 신흥국의 통화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데 이어 다른 신흥국 중앙은행들의 정책 결정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BNP파리바의 미즈라 베이그 아시아태평양 외환전략가는 블룸버그에 “싱가포르는 아시아 지역 (통화정책)의 전조로 여겨진다”며 “MAS가 완화로 돌아섰다면 다른 국가도 완화에 나설 여지가 커진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소재 UBS의 켈빈 테이 지역 수석 투자담당도 “역내 다른 국가들 또한 추가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 등 완화정책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내다봤다.
/이경운기자 clou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