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최대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는 마치 마지막 날처럼 변해갔다. 무너진 건물에서 피어오른 먼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요즘도 샌프란시스코의 명물로 꼽히는 시내 전차의 철로는 엿가락같이 휘었다. 공동묘지의 묘석도 넘어졌다. 지옥이 따로 없다고 절규하던 시민들에게는 더 무서운 재앙이 찾아들었다.
세 차례의 강력한 지진파가 할퀴고 간 뒤에 찾아든 재앙은 화마(火魔). 파열된 가스관에서 새어 나온 가스로 시작된 화재는 사흘간 건물과 주택 2만 8,000동을 불태웠다. 수도관도 끊겨 화재를 진압할 물도 없는 가운데 화재 저지선을 구축하기 위해 소방대가 활용한 다이너마이트도 도시 곳곳을 더욱 파괴하고 때로는 화재 범위까지 넓혔다.
일부 시민들은 손상된 집이나 건물에 불을 질렀다. 집이 천재지변으로 무너졌다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지만 누군가의 실수에 의한 소실이라면 보험금 일부라도 탈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도시는 이래저래 파괴되고 불탔다. 인명 피해도 컸다. 시민 40만명 중 28만명이 집을 잃고 수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추계는 최소 498명에서 최대 3,000여명. **
재산 피해도 컸다. 보험사들이 추정한 재산 피해액은 2억 3,500만달러(요즘 가치 265억 달러·비숙련공 임금 상승률 기준). 막대한 재해 보상금에 직면한 보험사들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영국의 로이드보험이 내준 보험금만 5,000만 달러(요즘 가지 56억 3,000만 달러). 유럽과 미국 보험사들이 내줄 보상금 액수가 커지며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이자율이 높아지고 결국 1907년 대공황으로 번졌다. ***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재앙에 주저앉지 않았다. 대지진 이후 14개월 동안 153회나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도 복구에 힘을 쏟았다. 누구보다 영웅으로 떠오른 사람은 이탈리아계 이민 1.5세로 지방은행을 경영하던 아마지오 피터 지아니니. 은행들이 6개월간 영업정지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드럼통에 널빤지를 얹어 책상을 만들고 복구자금 대출에 나서 최고 은행가로 부상하는 기반을 닦았다. ****
자동차 산업도 대지진 덕을 봤다. 구조작업에 동원된 군대와 소방대의 자동차 200여대가 종횡무진 활약하며 차의 신뢰도와 안전성에 대한 불신을 일소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1900년 8,000여대 수준이었으나 1912년에는 90만 2,000대로 늘어났다. 1908년 ‘T 모델’을 출시하며 시장을 석권했던 헨리 포드가 대지진의 반사이익을 누린 기업인의 대표격이다.
석유채굴과 정제업자 역시 웃었다. 마침 전기 등장에 따른 조명용 등유 수요 감소로 고민하던 상황. 석유업자들의 기대 영역 수준에 머물던 자동차와 휘발유 시장이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계기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며 산업 전반의 성장을 이끌었다. 록펠러 가문 등 석유 자본의 지배력 역시 보다 강해졌다.
군대의 역할도 조명받았다. 천재지변에서 맹활약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주변에 주둔하던 미 육군 4,000여명은 7월 초 임무를 경찰에 맡기고 철수할 때 까지 직접적인 인명 구호는 물론 이재민 수만명을 먹이고 입히고 천막과 간이주택을 지어줘 박수 받았다. 2만명이 넘는 이재민들이 군대가 난민 캠프에 건설한 임시 목조 주택 5,610채에서 살았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최초의 본격적인 국제 구호 사례를 낳은 재난으로도 손꼽힌다. 전신과 전화가 세계적으로 깔린 이후에 처음 맞는 국제적인 재난을 맞아 영국과 캐나다 등이 구호와 온정을 보냈다.
인간이 예측도 대응도 어려운 대재난이었던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각양 각색의 현대’를 낳았다. 대지진 110주년을 지나는 오늘날 지질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태평양과 북미의 거대한 땅덩이가 만나는 산 안드레아스 단층이 대재앙을 낳을 것이라는 2015년 6월 개봉작 ‘샌 안드레이스’가 단순한 허구에 그치기를 바라지만 대지진 이후 잠잠하던 단층들이 흔들리며 샌프란시스코는 1989년과 1994년에도 큰 지진을 겪었다.
지진의 공포는 바로 우리 옆 일본의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환태평양 ‘불의 고리’에 속한 에콰도르와 대만에서도 지진이 일어났다. 비록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이 보내준 성금액을 의도적으로 깎아내고 이번 구마모토 지진을 겪는 와중에서도 일부 일본 네티즌은 ‘한국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악의적 헛소문을 트위터에 퍼트렸다고 하지만 소중한 고귀한 인명의 손실이 없기를 인류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리히터 지진계 기준. 당시 측정된 기록이 아니라 요즘 지질 과학자들의 추정치
** 사망자 추계의 편차가 큰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 약탈이나 방화, 수감시설 탈출로 총 맞아 죽은 인원은 애초 사망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지진의 와중에서 총을 맞아 숨진 인원이 500명이 넘는다는 추정도 있다. 두 번째로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 역시 사망자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백 명 남짓이던 조선인은 사망자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새로 건립한 한인 공립협회 건물은 파괴됐는데 복구 비용 전달 과정에서 일본 통감부가 농간을 부린 적이 있다.
*** 1907년의 대공황은 이자율이 높아진 가운데 3월 뉴욕 니커보커 투자신탁회사의 자금난을 시발로 전세계로 퍼진 공황. 특히 보어전쟁과 러일전쟁에 투입된 은행 대출금이 회수되지 않는 터에 잉글랜드은행의 금보유고가 줄었다는 소식에 뉴욕과 유럽 외환시장의 주가와 환율이 요동쳤다. 변방이던 일본증시까지 폭락세로 접어들었다. 이런 마당에 미국 일부 재벌의 구리광산 투기 사건이 터지며 사건은 더욱 커졌다. 워싱턴과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 같은 주는 은행 영업까지 정지시켰다. 파리와 로마에서는 은행 창구에서 예금인출 소동이 벌어지고 일부 이탈리아 은행이 파산을 맞았다.
위기의 금융시장을 구한 사람은 큰 손이자 은행가인 J.P. 모건. 미국 정부가 협조를 당부하자 모건은 10월 하순께 돈의 홍수를 일으켜 증권사와 투신사에 자금을 대줬다. 결국 1907년 공황은 모건의 위력을 확인시켜주며 큰 파장 없이 진정됐다. 자존심이 상한 미국 정부는 근본대책 마련에 나섰다. ‘다시는 민간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다짐의 결과물이 1913년 출범한 연방준비제도(FRS)다. 대지진이 태풍을 일으키는 나비의 날개짓처럼 연쇄 작용을 일으키며 미국에 중앙은행제도를 안겨준 셈이다.
**** 지아니니는 뉴밀레니엄을 앞둔 지난 1999년 미국 타임지가 ‘20세기를 건설한 20인의 거인’ 중 하나로 꼽은 인물이다. 소비자 금융과 전국적 은행 지점망의 틀이 그에게서 나왔다. 지역에서 자수성가한 금융업자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발생하자 ‘예금보장과 복구비용 무이자 대출’을 약속하며 전국적인 금융가로 뛰어올랐다. 1928년에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까지 사들였다. 주택저당담보대출 등 서민금융도 그가 선보였다.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소외산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영화와 캘리포니아 와인이 그의 지원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산업. 지진 다발지대라서 위험하다는 금문교 건설에도 자금을 댔다. 초기의 월트 디즈니와 찰리 채플린도 그에게서만 돈을 얻을 수 있었다. 지아니니의 경영권이 흔들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은행 고객들이 주식을 사서 전달해줬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개인 치부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목돈이 생기면 열심히 기부해 1949년 사망(79세)했을 때 유산은 50만 달러에 못 미쳤지만 ‘사람을 위한 돈이라는 가치를 추구한 20세기의 로빈 훗’으로 기억된다.
***** 미 육군이 당시 정부 자금으로 건설한 목조주택은 임시 거처 용도였지만 견고하게 지어져 1960년대까지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면적 45~67㎡인 이 가옥의 당시 임대료는 월 2달러였다. 50달러면 구입해 자기 소유 주택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제작 원가는 약 100달러였지만 피해 주민 지원책의 일환으로 반값에 팔았다. 도심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임시주택은 2006년 60만 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팔려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