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왕도정치의 꿈’ 수원화성



행궁 앞 광장에서는 매일 오전11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 실전 무예를 시연한다.


행궁 뒤편 언덕에서 내려다본 전경.


북동적대에서 바라본 수원 화성. 봄의 빛깔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다.


봄 빛깔에 겨운 수원 화성은 찌푸린 하늘 아래에서도 고운 자태를 잃지 않는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즉위한 직후인 지난 1776년 3월 백성들을 가르치는 문서인 윤음에서 밝힌 내용이다. 정조의 이 말 한마디에 사도세자를 뒤주 속으로 몰아넣은 노론들은 온몸을 떨었지만 수원 화성과 행궁의 역사는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됐다.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수원 화성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뒤주 속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천하 명당인 화산으로 이전한 뒤 인근 백성들을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축성됐다. 핏줄이 그리웠던 효자 정조는 11년간 13차례에 걸쳐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이 있는 화성을 찾아 외로움을 달랬다.


올해는 축조 220년을 맞은 화성방문의해다. 화성의 둘레는 5.7㎞. 천천히 걸으면 두 시간 거리지만 곳곳에 얽혀 있는 사연과 역사를 반추하면서 돌아보려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이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됐다. 이후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부터 1796년(정조 18~20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 축성 기간에 확장 완공됐다. 576칸 규모인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행궁 중 유일하게 정궁 형태를 갖춘데다 규모도 가장 크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건물들은 일제의 역사 말살 정책으로 헐려버리고 말았다. 이후 1980년대 말 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돼 복원 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공사가 시작돼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됐고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기에 이른다.

기자는 화성 탐방을 행궁에서부터 시작했다. 행궁으로 들어서 왼쪽으로 접어드니 봉수당이 눈에 들어왔다. 동행한 해설사는 “화성행궁의 중심 건물인 이곳은 행차 때마다 정전으로 쓰였던 건물로 정조는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른 후 ‘봉수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며 “봉수당 옆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내려온 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말했다.

정조가 이곳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연 까닭은 사도세자와 홍씨가 동갑인 까닭에 어머니의 잔치를 치르면서 아버지도 함께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나가 머물던 행궁은 온양·과천 등에 산재했지만 화성행궁이 역사적 가치를 평가 받는 것은 규모와 완성도 때문이다. 다른 행궁은 방의 숫자가 150~200칸이었지만 화성행궁은 600칸으로 정궁과 다를 바 없었다. 정조는 “나중에 세자가 15살이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와서 살겠노라”며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이곳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행궁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65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축조부터 완성, 그리고 오늘날까지 화성과 행궁의 성쇠를 지켜본 산 증인이다. 해설사는 “2001년 월드컵을 1년 앞두고 말라죽어 가던 나무에 새순이 나기 시작했다”며 “그런 영험한 기운 덕에 소원을 비는 내용을 적어 새끼줄에 꽂아놓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해서 이곳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행궁 구경이 끝나면 수원화성 성곽을 둘러봐야 한다. 성곽 순례는 행궁을 나서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장안문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 위에서 내려다본 성곽은 버드나무 잎새 모양인데 팔달문(남)과 장안문(북)은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다. 창룡문(동)과 화서문(서)이 동서의 출입문 구실을 하고 있는데 장안문 문루 중 절반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새로 복원한 것이고 성곽 곳곳에는 전쟁의 상흔인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애초 수원화성은 당쟁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조의 구상에 따라 지어진 것이며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외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화성 축조에 당대의 학자들과 기술을 총동원했다.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을 토대로 설계했고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 완공한 조선 후기 건축물의 걸작이다. 축성시 거중기·녹로 등 당시로는 최신 장비를 동원해 석재 등을 옮기는 데 이용했다.

화성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 일부가 훼손됐으나 1975~1979년 사이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축성 당시 모습을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글·사진=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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