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칼럼]리더십 잃은 정치의 시대

총선거, 정치권력 지형에 대변화
정책 집행 열쇠 정부에서 국회로
조선 왕조 리더십 실종 재연될라

논설실장


강원도 영월군 소재 장릉(莊陵)에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비운의 주인공 단종의 묘와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곳을 둘러보는 관람객의 반응이 남다르다. 기념관 어느 구석을 가나 “아이고 불쌍해라”라는 탄식이 끊이지를 않는다. 물론 누가 봐도 단종은 억울한 정치적 희생양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비극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조선 왕조는 유달리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이 갈등을 빚던 시대였다. 이런 와중에 왕좌에 오른 단종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 조정은 자연히 신료 중심으로 돌아가고 인사권마저 그들 차지였다. 왕실 종친의 핵심인 수양대군으로서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사대부 집단과 수양대군 사이에 권력의 소재를 둘러싼 투쟁은 필연으로 흘러갔다.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듯 왕권과 신권의 상호 견제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조선 왕조에서 ‘리더의 책임의식’은 실종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직전이 좋은 예다. 누구나 왜군의 침입을 예상했음에도 절도사들은 인기 없는 군비 강화에 대해 아무도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자칫 사소한 논쟁에라도 휘말리면 조정에서 변호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은 물론 신하들도 책임전가로 일관했다. 국가의 흥망과 백성의 삶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임에도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대립만 일삼는 조선 정치의 병폐야말로 왜란을 초래한 주범이었다.


왜군과의 싸움이 장기화하면서 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백성마저 굶어 죽는 위기에 처하자 조정 신료들과 국왕은 또다시 말다툼을 벌인다. 신료들이 국왕의 개인 재산을 군량으로 풀자고 하자 선조는 “사대부들의 것을 왜 먼저 쓰지 않는가, 자기들 것부터 베풀라”고 답할 정도였다.

조선 500년 역사를 이어온 태조로부터 27대 순종 중 가장 뛰어난 군주를 꼽으라면 세종과 정조일 것이다. 하지만 세종의 부친 태종은 사대부들의 나라가 아닌 군권 확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인물이다. 덕분에 세종은 조선 역대 어느 왕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수많은 훈신과 척신들의 피가 세종의 탁월한 리더십을 꽃피게 한 밑거름이었다. 반면 정조는 노론 사대부들의 견제로 인해 잠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정조가 비록 정치의 시대적 요청을 이해했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4·13 총선거로 집권 새누리당의 과반 의석이 깨지면서 여야 간 극한 대결구도가 형성돼 정국이 혼란에 휩싸이고 국정 운영에 큰 차질이 빚어지면서 ‘식물 정부’가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총선 직후 ‘아무 것도 되는 일 없는 블랙홀 국회 걱정된다’는 제목의 사설을 준비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물론 다른 한쪽에서는 극단적 대립이 사라지고 대화와 타협으로 민생·경제법안들이 처리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싹트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필자는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총선이 끝나자마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세월호특별법 개정과 국정교과서 폐기를 들고나왔다. 테러방지법도 개정하겠다고 한다. 입으로야 여전히 경제와 민생을 되뇌지만 청와대와 여당에 대한 ‘예송(禮訟)논쟁’으로 20대 국회 주도권을 잡겠다는 속내야 달라질 리 없다. 박 대통령 청문회가 있으리라는 발언까지 나오는 판이다.

더 큰 문제는 시급한 경제 현안들이 여소야대 국회에 발목을 잡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노동 부문을 포함한 4대 구조개혁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따져보겠다는 게 야당 지도층의 언급이다. 이쯤 되면 통과된다 한들 형해화(形骸化)는 기정사실이다. 21세기 사대부들의 이기이원론식 기업구조조정이 언어의 성찬으로 끝나리라는 것도 기우가 아닐 것이다.

이번 선거결과에 대한 바깥의 평가는 한마디로 한국 경제의 ‘정치 리스크’로 집약된다. 신용평가사 피치와 무디스는 여당이 패배하면서 한국 정부가 핵심적인 구조개혁을 실행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정책 집행의 최종 열쇠를 국회의원들이 쥐고 있는 마당에 정부 의지가 제대로 이행될지 의구심이 든다는 이야기다. 리더십이 사라진 ‘무책임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shinwo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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