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응원단장 출신의 '좌충우돌' 크로아티아 창업기

단번에 결정했던 크로아티아 창업
결혼도 미뤄가며 사업에 몰두해
목표는 유럽 각지에 게스트하우스 체인을 갖는 것

▲‘러브크로아티아’ 김승훈(32) 대표
한국인에게 크로아티아는 생소한 나라다. 크로아티아란 단어를 듣고 한국인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축구’, ‘코소보 내전’ 정도?

KOTRA의 2015년 국가정보에 따르면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는 교민은 57명에 불과하다. 이것도 대사관 직원과 같이 상주하는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한 숫자니 우리에겐 너무도 먼 나라란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척박한 땅을 개척하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청년이 있다. 벌써 크로아티아에서만 세 곳(자그레브,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 전 유럽에 걸쳐 7곳의 게스트 하우스 체인을 운영하고 있는 32살의 청년 김승훈 러브크로아티아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 연세대에서 응원단장을 하며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김씨는 어느새 3년차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란 색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게 크로아티아와의 인연은 우연치 않게 찾아왔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룸메이트였던 크로아티아인 친구와 가깝게 지냈다. 그때까지 김 대표에게 크로아티아는 미지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룸메이트에게 크로아티아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었고, 미지의 나라에 대한 매력에 빠질수록 그곳에서 살면 어떨까 상상했다고 한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 대표는 한동안 방황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취업의 문을 두드리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그가 향한 곳은 프랑스 파리. 파리의 한인 민박에서 머물렀던 그는 여행자들이 들러 휴식을 취하고 이국땅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전세계 사람들과 자유스럽게 소통하는 모습에 푹 빠졌다.

▲여행을 좋아해 자신의 ‘인생길’을 ‘게스트 하우스’로 정해버린 김승훈씨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그는 자신의 ‘인생 행로’를 정하고, 유학 시절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크로아티아로 향했다. (한인 민박으로는) 미개척지인 그곳에서 씨를 뿌려 성공하기만 한다면 이후의 모든 일은 술술 풀릴 거란 자신감도 있었다.

그렇게 게스트 하우스 체인 ‘러브크로아티아’가 탄생했다.

기존의 게스트 하우스와 ‘러브크로아티아’의 차별화 지점은 ‘소통’이다. 다른 게스트 하우스가 시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실험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게스트 하우스에 머무는 사람들과 한국인 유학생들이 함께 선보인 ‘코리아 요트 위크’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함께 요트를 타고 웃고 떠들면서 추억을 만드는 이 행사는 김씨가 ‘소통’에 착안해 만들어낸 것이다.

“크로아티아의 때 묻지 않은 바다와 요트가 절묘하게 어울리면서 손님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줬습니다. 저 역시 함께 했는데, 일회성 행사가 아닌 연례화해도 될 만큼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지난해 ‘러브크로아티아’가 주최한 ‘2015 Korean Yacht Week in Croatia’ 영상

물론 사업이 쉬웠던 건 아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의사소통 문제와 현지인의 따가운 시선이었다고 한다.

“소통이 되지 않아 현지인들과 일 처리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한 점,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나 선입견이 유럽 내에서도 강한 편이라 사업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죠.”

사업이 커지고 있는 지금도 고충은 여전하다. 투숙객이 많아지면서 게스트 하우스에 대한 인식은 상당 부분 개선됐지만 아직도 외국인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규제가 적지 않다. 또 유럽 각지로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현지 직원들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아 직접 달려가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일도 많다고 한다.

▲현재 러브크로아티아 이사진. 사진의 왼쪽부터 김승훈 대표, 샤르단 바로비치 법률자문 이사, 주민수 이사, 박도형 이사.
가족도 없이 먼 이국땅까지 와서 했을 고생을 생각하니 안타까워서 한 마디 던졌다. “힘들 때는 어떻게 버텼나요”

그는 지난 고생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런 세월을 꿋꿋하게 버텨낸 자신의 삶에 미소를 보냈다. “사업을 계속 확장하다 보니 돈 문제가 가장 힘들었지만 하나 둘씩 고비를 넘기는 게 바로 사업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러브크로아티아(LoveCroatia)’가 문을 열었던 2014년. 김 대표는 크로아티아에서 내내 혼자였다. 사업은 조금씩 성장했지만 마음 한 켠에 자리한 외로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을 마친 저녁 시간, 친구들의 소셜네트워크(SNS) 페이지를 보며 온라인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런 그를 걱정하는 후배들이 있었다. 같이 응원단에서 동고동락했던 주민수(31), 박도형(31) 씨였다. 좋은 직장을 얻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던 이 둘은 먼 타국에서 고생하는 선배를 위해 크로아티아로 날아왔다.

▲김승훈 대표와 주민수, 박도형 이사의 대학 응원단 시절 모습
김 대표는 “민수와 도형이는 한국에서 생업이 있었는 데도 같이 일을 하자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어요. 너무 고마워서 둘이 크로아티아로 들어오는 날, 붙잡고 엉엉 울었어요.”

이들 덕분에 김 대표는 사업에 온 힘을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합류한 후 6개가 넘는 게스트 하우스 체인을 만들었고, 지금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헝가리 부다페스트, 이탈리아 밀라노 지점 개소를 앞두고 있다.

성공한 사업, 넓어진 인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 대표의 가슴에 무겁게 남아 있는 ‘돌멩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고국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가족 때문이다.

“처음 크로아티아를 가겠다고 결심한 것을 부모님께 말씀 드리는 게 쉽지 않았어요.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너무 걱정됐죠”

그러나 그는 확고한 자신의 뜻을 부모님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전달했다.

“부모님 앞에서 사업계획을 파워포인트로 발표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어요. 그때는 그런 믿음을 보여주신 부모님께 어떻게든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어요.”

김 대표는 출국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인사하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돈을 벌려고 일하지 말고 해외를 여행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불편하지 않게 크로아티아라는 나라를 여행할 수 있게 배려해 주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이 지금까지도 가슴 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성공에 대한 기쁨보다 아버지의 말을 하루하루 실천해왔다는 뿌듯함이 더 크다고 한다.

김 대표는 매주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부터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1,500㎞가 넘는 길을 왕복한다. 5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문을 여는 ‘러브바르셀로나’ 1호점 때문이다. 사업 확장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멀리 이국 땅에서 혼기를 놓칠까 걱정이란다.

“가족들은 오로지 사업에만 몰두하는 나를 보며 결혼 시기를 놓칠까 걱정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평생의 반려자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드네요. 그런데 아직은 갈 길이 멀어요. 회사가 더 자리 잡고, 그동안 해보고자 했던 일을 마무리한 뒤에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라는 나라는 이제 저에게 제2의 고향이 돼 버렸습니다. 여기에 온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제 꿈을 만들고 펼칠 수 있게 해준 나라이니까요”
32살 청년의 ‘크로아티아 도전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유럽 전역 30개 도시에 러브 게스트 하우스를 프랜차이즈로 운영하는 게 제 꿈입니다. 너무 목표치가 높긴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꿈을 이룰 날도 오겠죠.”

32살 청춘의 당찬 꿈이 유럽에서 꽃 피우길 응원해 본다.

/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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