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레모 협정과 세브르 조약은 터키와 미국 두 나라를 들끓게 만들었다. 마침 패전과 더불어 터키 독립전쟁이 시작되던 시기. 산레모 협정에 자극받은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똘똘 뭉쳐 터키-그리스 전쟁에서 승리하는 한편 내부를 개혁하며 오늘날 터키공화국의 기반을 닦았다. 독립전쟁에서 완전 승리한 터키는 연합국과 재협상을 펼쳐 1923년 로잔회의에서 세브르 조약 무효까지 받아냈다. 터키인 절대 다수로부터 ‘국부’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끈 민족주의자들의 ‘국민운동’이 없었다면 터키는 이스탄불 상실은 물론 영토 크기도 요즘의 30% 정도로 쪼그라들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은 배신감에 떨었다. 1차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사용한 석유의 90%를 공급했음에도 산레모 회의 참석조차 교묘하게 배제된 채 전리품 배분에서 소외됐다는 사실에 열 받았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전승 연합국간 평등한 권리를 부여한다’는 베르사이유 종전조약 위배라는 반응이 나왔다. 미국 석유업계는 한걸음 더 나가 ‘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식 제국주의의 잔재’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왜 국제 문제에 석유업계가 나섰을까. 세계최대의 산유국이지만 자원이 언제 고갈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속에 가능성의 땅, 중동을 주시하고 있던 터. 유전이 발견(1908년)된 지역은 페르시아 뿐이었지만 부존 가능성이 많은 중동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 먹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미국 석유업계의 관심사도 오스만제국의 해체보다는 중동 지역 금긋기에 있었다. 산레모 협정은 오스만의 강역을 8개로 나눴으나 중동지역만큼은 영국과 프랑스만 차지했다. 가장 큰 이익을 차지한 나라는 영국. 팔레스타인과 독일이 오랫동안 공들였던 메소포타미아(이라크)지역을 먹었다. 프랑스의 영역은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으로 국한됐으나 영국이 중동지역에서 개발하는 석유 지분의 25%를 넘겨 받았다. 중동지역의 석유개발권을 보유한 터키 석유회사의 독일 지분 25%를 얻는 덤도 챙겼다. 석유 메이저의 하나인 프랑스 국영석유회사(CFP)도 이 협정의 결과물로 1924년 태어났다.
영국과 프랑스는 왜 미국까지 따돌리며 무리한 협정을 맺었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석유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 영국은 전쟁기간인 1916~1917년 극심한 석유 부족으로 추위에 떨고 군 장비의 연료 부족을 겪었다. 군대의 기동력이란 말의 숫자가 아니라 마력(馬力)으로 표시되는 내연기관을 갖춘 비행기와 자동차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통감하며 석유 부존 가능성 지역에 사활을 걸었다.
두 번째 요인은 1916년 비밀리에 체결한 사이크스-피코협정. 영국과 프랑스가 제정러시아와 더불어 중동을 분할하기로 약속한 비밀협정이 볼세비키 정권에 의해 1917년 말 폭로되고 전쟁이 끝난 뒤 의혹이 짙어지자 문제가 커지기 전에 현실로 굳히려 마음 먹었다. 세 번째는 아랍 민족주의의 대두. 약속대로 영국이 독립 국가를 세워줄 것으로 믿었던 아랍민족들은 시리아 등지에서 독립의 깃발을 올렸다. 영국과 프랑스가 구상한 반식민통치 계획의 걸음걸이도 빨라졌다. ***
산 레모 협정은 아랍 민족의 반발을 낳고 운명도 갈랐다. 종전 후 독립시켜준다는 약속을 믿고 영국군 정보장교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도와 오스만 튀르크군과 전쟁을 치르며 10만명의 전사자를 낸 끝에 다마스쿠스에 자리 잡아 시리아 국왕임을 선포했던 파이잘 1세는 프랑스에 의해 쫓겨났다. 영국은 분노한 파이잘을 설득해 명목뿐인 이라크 국왕으로 앉혔다. 이라크 국왕이었던 파이잘의 형은 요르단 국왕으로 왕관을 바꿔 썼다.
반면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영국은 산레모 협정의 결과로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을 부추겼다. 영국의 주요 신문들은 산레모협정 다음날부터 ‘시오니즘 운동에 큰 기회가 왔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유대인들이 급증하며 1,800년 이상 무슬람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중동지역에서는 증오와 원한이 깊어졌다. 영국과 프랑스가 기획한 중동 석유 독과점 시나리오를 깬 나라는 미국 뿐이다.****
끊임없이 지분조정을 요구한 미국은 결국 1927년 23.5%의 지분을 확보하며 중독의 석유 이권에 발을 들였다. 산레모협정에서 시리아와 요르단, 팔레스타인, 그리고 석유 부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기대받던 메소포타미아(이라크) 쪼개 먹기에서 배제된 미국은 근접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눈을 돌렸다. 사우디와 접촉을 책임졌던 인물인 광산업자 출신의 상무장관 허버트 후버는 몇년 뒤 미국 31대 대통령에 뽑혔다. *****
산레모 협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강대국의 지배의 논리는 여전하다. 미국과 영국은 선거로 뽑힌 이란의 민주정권이 석유자원 국유화를 진행한 1953년 군부 쿠테타를 사주하고 지휘해 외세에 고분고분한 독재 왕정을 심었다. 팔레비 국왕의 학정 결과가 1979년 이슬람 혁명. 두 차례의 이라크 전쟁도 석유 패권 유지라는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오늘날 중동을 휩쓰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테러, 이스라엘의 지역 패권주의와 팔레스타인의 저항도 앵글로 색슨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영국은 물론 프랑스 역시 인구의 절반이 유랑하는 시리아 난민의 비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차대전에서 일본의 유럽 전선 파병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기간 중 일본은 수출과 상선대 운용으로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아시아지역에서 독일 동양함대의 근거지였던 중국 산동성의 청도(칭따오)와 태평양에 산재한 독일의 식민지를 접수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거듭 요청한 유럽전선 파병은 거절하는 게 기본 방침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수송선 격침이 잇따르자 1915년 초부터 인도양과 지중해까지 함대를 파견, 호위와 구조활동을 펼쳤다.
일본은 순양함과 구축함 18척으로 주로 지중해에서 작전하며 78명의 전사자를 냈다. 구축함 한 척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U-보트(잠수함)에 대파되며 발생한 전사자 59명은 몰타 섬에 묻히기도 했다. 막상 전승국 자격으로 참가한 산레모협정에서는 이렇달 할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 프랑스 파리 근교의 세브르에서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1920년 8월 10일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산레모협정의 재확인. 오스만 제국은 이로 인해 광활한 영토의 대부분을 공식적으로 잃었다.
*** 영국은 1차대전에서 이중 플레이로 중동 비극의 싹을 키웠다. 독일과 동맹인 오스만 제국과 싸우던 영국은 1915년 아랍 부족들에게 협력하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서한(맥마흔 서한)으로 남겼다. 영국으로부터 10여 차례나 독립 약속을 확약받은 아랍 부족들은 영국군 정보장교 토마스 로렌스(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인공)와 함께 시리아와 요르단, 팔레스타인에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영국은 1917년 벨푸어 외상이 유대인 재벌 베이론 로스차일드에게 ‘유대인들이 영국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면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급한 나머지 정반대의 두 가지를 약속한 영국은 유대인과의 신의만 지켰다.
**** 터키공화국은 독립전쟁에 승리하고 재협상을 통해 산레모협정을 무력화시켰으나 전신인 오스만제국의 강역 중에서 이스탄불과 소아시아지역만 지켰을 뿐 중동과 아프리카 영토는 잃었다.
***** 후버의 지원 아래 탐사에 나선 미국 석유회사 캘리포니아스탠더드오일(소칼)은 사우디 측과 합작해 1933년 캘리포니아-아라비안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하고 1938년 3월, 이전까지는 상상도 못한 거대규모 유전을 잇따라 발견했다. 캘리포니아-아라비안스탠더드 오일은 1944년 회사 이름을 바꿨다. ‘아람코’로. 1988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100% 지분을 획득하며 ‘사우디 아람코’로 개명한 이 회사는 세계최대의 석유기업으로 기업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계 투자은행들에 따르면 사우디 아람코가 상장되면 세계 시가총액 1위인 애플사를 가볍게 누를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가 이 회사의 기업공개를 추진하는 이유는 저유가 현상이 이어지면서 국가 재정에 빨간 불이 켜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