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구조조정 시스템은 모양만 보면 그럴듯하다. 컨트롤타워 격인 ‘범부처협의체’가 운영되고 있고 여기에 산업은행 구조조정 담당 부행장과 수출입은행 임원이 포함돼 채권단과의 연결고리도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내실이 부족하다. 범부처 협의체에도 업종별 구조조정 전문가는 빠져 있다. 가장 실무에 밝은 참석자가 개별 부처 국장·과장 수준이다.
협의체에 업종분석자료를 제공하는 국책은행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산은만 해도 30여명으로 구성된 산업분석부를 둬 개별 업종을 다루고 있지만 한 업종을 10~20년 파고 연구한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는 드물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정책금융기관이 정치권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채권단은 그간 부실기업에 대한 관리·감독은커녕 기업 경영진과 결탁해 부실을 눈감아주는 등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왔다.
시장에서 채권단과 별개로 구조조정 작업을 집행할 ‘전문가 컨소시엄’을 만들어야 한다는 충고가 계속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국채 발행이든 한국은행의 발권력 동원이든 자금 마련에 치중하고 구조조정 실행은 전문가그룹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한 금융계 고위인사는 “산은과 수은에 기업 재무분석가는 있을지언정 제대로 된 업종분석가는 없다”며 “정부가 지난해 하반기에도 기업여신 분석 작업을 시도했지만 업종·기업별 사전부실징후를 파악할 수 있는 전문가가 부족해 작업이 흐지부지됐다”고 설명했다. 한 산업계 고위관계자는 “단순히 재무구조만 다듬는 식의 업종개편으로는 한계가 분명한 만큼 업종 흐름을 꿰뚫는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도 지난 1998년 조선업종 개편 당시 ‘조선산업경쟁력전략회의’를 꾸려 금융뿐 아니라 산업 분야 민관 전문가를 활용했다. 이 회의를 통해 8개 조선사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청사진이 나왔는데 이 계획을 실행한 이는 민간 전문가였다. ‘정부가 큰 그림, 채권단은 자금줄, 금융 및 산업 전문가그룹은 구조조정 실행’ 형태로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현실이 이런데도 정부는 ‘업계 자율 구조조정’이라는 허울만 그럴듯한 명분에 집착하고 있다. 정부는 오는 7월 글로벌 컨설팅업체가 내놓는 ‘업종분석 보고서’를 참조해 구조조정 방향을 정하겠다는 입장만 되뇌고 있다. 하지만 업종분석 보고서는 ‘과잉공급업종’에 속하는 기업을 사업재편으로 유인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일 뿐 칼자루를 쥐고 외과 수술을 진두지휘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한 금융계 고위인사는 “올 초 대만 폭스콘이 애초 우선협상대상자가 됐을 때 제시했던 가격의 딱 절반 수준에 일본 샤프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구조조정 전문가가 샤프의 숨겨진 부실자산을 대거 발견했기 때문”이라며 “인수합병(M&A) 등 구조조정 과정에서 전문가의 역량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해운·조선·철강 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점도 산업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다른 업종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는 섬세한 구조조정이 되지 못하면 추후 경기회복 국면에 낭패를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이상훈·조민규기자 s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