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를 사용하는 행위는 비웃음과 분노까지 샀다. 왜 그랬을까. 음식은 손으로 먹는 게 예절이었기에. 성직자들은 동로마제국 공주 출신 총독 부인의 행위를 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다. 신의 선물인 음식을 손으로 만지기를 거부하다니!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탈리아 전역에 포크로 식사하는 예법이 퍼졌다. 1533년 메디치가의 카트린 공주가 프랑스 왕세자인 앙리 2세에게 시집가며 꾸린 혼수품에는 포크가 가득 들어 있었다.
물론 프랑스에도 포크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으나 저자에 따르면 본격적인 사용은 이때부터다. 카트린의 아들 앙리 3세는 식사할 때 반드시 포크를 사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칙령의 명분은 ‘음식을 깨끗게 먹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다른 효과도 거뒀다. 포크를 사용하면 보다 천천히 먹고 그 양도 적어졌다나.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 프랑스를 거친 포크 문화는 17세기 무렵에는 독일까지 영역을 넓혔다.
포크의 사용 시기가 그렇다면 나이프는 어떠했을까. 가늠하기 어렵다. 채집하고 사냥해 살아가던 선사시대부터 썼을 것이라는 추정만 있다. 포크가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식사했을까 궁금해진다. 간단하다. 손과 나이프. 대개는 맨손으로 음식을 먹었고 손에 기름을 묻히기 싫어 나이프가 한 개에서 두 개로 늘어났다. 나이프 하나는 음식을 누르고 나머지 하나로 잘랐다.
나이프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근대식 식사용 나이프의 탄생 기록은 전해져 내려온다. 1637년 5월13일,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런 명령을 내렸다. ‘끝이 날카로운 칼을 식탁에서 사용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당장 반발이 따랐다. ‘그렇다면 음식을 어떻게 먹으라는 말인가.’ 추기경이 답을 내놓았다. ‘끝이 무딘 칼은 사용해도 무방하다.’ **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 악의 화신으로 그려졌을 정도로 절대권력을 휘둘렸던 리슐리외는 왜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식사를 마칠 때마다 날카로운 칼로 이를 쑤시는 한 성직자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걸핏하면 만찬장소가 칼부림 장소로 변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해석이 상존한다.
어느 편이 맞을까. 알 수 없다. 확실한 점은 이때부터 식사예절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선 식탁용 칼의 끝이 원형으로 바뀌었다. 칼끝으로 고기를 찌를 수 없게 되자 대용품인 포크의 사용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루이 14세가 결투를 최소화하기 위해 1669년 뾰족한 칼의 식탁 사용을 법령으로 금지한 후 끝이 둥근 칼과 포크의 조합이 자리잡았다.
산 속의 수도원에 살면서 새로운 시대와 풍속에 대한 적응이 늦었던 수도사들은 ‘하나님이 주신 손가락을 두고 왜 도구를 쓰냐’며 맨 손 사용을 고집했으나 소용없었다. 전반적인 생활수준 향상으로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식사용 도구의 사용이 일반대중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단검과 손가락에 의지하는 식사습관의 도구화는 급속한 문명화로 이어졌다. 맨손으로 마음껏 고기를 뜯어먹고 포식하는 습성은 야만으로 치부된 반면 식사 도구 사용은 절제의 미덕으로 칭송 받았다. 식사용 나이프의 정착을 문명화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시각도 있다. 그래 봐야 오늘날 서구식 식습관과 매너가 자리 잡은 것은 길어야 350여년 남짓에 불과하다.
장구한 역사를 지닌 동양의 젓가락 문화와는 상대가 안 된다. 기원전 약 4,000년 전부터 사용된 젓가락의 정확도는 서양의 식사 도구와 비할 게 아니다. 나이프나 포크로 작은 콩을 정확하게 집거나 생선살을 발라낼 수 있는가. 정밀 실험실의 채집과 분리 과정에서조차 젓가락을 사용하는 동양의 정교함이 미래에서는 어떻게 평가받을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제사용 포크는 로마시대부터 있었으나 식사용 포크의 사용은 어느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포크를 받아들일 때 ‘오디처럼 손가락을 물들일 음식을 먹을 때’로 국한했다.
** 소설 ‘삼총사’의 극중 묘사처럼 리슐리외는 악의 화신이었을까. 그랬다면 프랑스 국립박물관 제1전시실(리슐리외실)과 캐나다 퀘벡주의 강(리슐리외강)에 그의 이름이 왜 붙어 있을까. 실제 역사에서 리슐리외는 39살부터 권력의 정점에서 57세로 사망하기까지 프랑스의 국력 강화를 위해 매진한 인물로 기억된다. 국제종교전쟁이었던 30년전쟁에서 리슐리외는 가톨릭 국가 스페인을 견제하려고 신교국 스웨덴과도 손잡았다. 추기경의 신분임에도 국가이익을 종교보다 우선시한 그는 ‘신구교 동맹’의 첫 사례도 남겼다. 왕권 강화를 위한 조세제도 개혁으로도 유명하다. 강해지는 왕권에 대항해 반란까지 일으킨 귀족들을 감시하기 위해 그가 프랑스 전역에 깔았던 첩보조직을 근대적 관료제도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소설 속에서 미움을 샀던 이유는 종교의 벽을 넘으려 했다는 점과 조세 개혁, 첩보조직 운영에 대한 반감으로 보인다. 또 있다. 프랑스 왕실과 메디치 가문 간 혼인을 성사시키는 주역을 맡았는데 메디치 가문은 프랑스 민중들에게 혐오스런 외국인이었을 뿐이다. 악감정이 쌓여 소설 속의 허구 인물을 탄생시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