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회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거나 기업의 최고 경영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건을 보면 의아하게 느낄 때가 있다. 검사 시절에 타인의 사소한 잘못마저 추상같이 추궁하고 그 잘잘못을 따지던 사람이 변호사가 돼 평소 자신이 추궁할 만한 언행을 하기도 한다. 전관예우의 관행이라고 하더라도 관용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업무와 노무 관리에서 책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자신이 책임질 일이 있으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라도 법망을 피하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건이 되고 나서야 외부로 알려진다. 아마 훨씬 이전부터 스스로 평소와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감지했겠지만 별일 아니라고 넘어가고 그 사실을 알려주는 주위 사람들의 경고를 화내며 무시한 결과로 인해 지금 언론의 초점을 받는 상태가 됐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루에도 여러 가지의 혹이 생겼다가도 금방 사라지기도 하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사라지기도 하지만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경우도 많다. 사라져야 하는 혹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음에 남으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장자는 “작은 혹은 한 번씩 길을 잃지만 큰 혹은 아예 본성을 바꾸게 된다(소혹역방·小惑易方, 대혹역성·大惑易性)”고 말하고 있다. 몸의 병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혹을 느낄 때 그냥 넘어가면 그것이 소혹으로 자라고 소혹을 그냥 넘어가면 대혹으로 자라게 된다.
사람이 소혹의 상태에 이르면 평소와 다른 언행을 한두 번씩 하게 된다. 반성하면 소혹이 사라지지만 그렇지 않고 화를 내면 대혹으로 자라게 된다. 대혹의 상태에 이르면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이미 본성이 바뀌어버려서 ‘이전의 나’가 누구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철없는 시절의 유치한 모습으로 간주하게 된다. 한 번씩 길을 잃은 소혹도 경계해야 하는데 본성을 잃어버린 대혹은 자신의 부조리마저 정당화시키게 된다.
우리는 대혹역성에 이른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정의를 세워야 한다. 건강 검진을 해 질병의 징후를 찾아내 건강을 지켜 고통을 줄이듯이 인성 검진을 해 소혹과 대혹의 징후를 찾아내 일관성을 지키도록 하는 개인과 사회의 틀을 만들어 남의 고통을 줄이도록 해야겠다.
신정근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