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 워치] 주력산업 위기경보 외면하는 한국

국책硏 3년전 조선·해운업 경고 담은 보고서 내놓자
기업들은 반박, 정부는 부당압력 행사·감추기 급급
싱크탱크 활용 제대로 못해 위기대응 시스템 '구멍'

A국책연구기관은 지난 2013년 현재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휩싸인 조선·해운 업종 등에 대한 강도 높은 경고를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다. 조선업에서는 주요 그룹 조선사의 부채비율이 타 업종에 비해 급격히 높아지고 있고 해운에서는 아예 선제 구조조정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기관은 보고서가 나간 뒤 몸살을 앓았다. “이런 보고서를 만든 저의가 뭐냐”는 기업들의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국책연구기관에서 산업분석을 담당하는 한 연구원은 “기업에 불리한 내용의 보고서가 나갈 때는 한바탕 홍역을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며 “심지어 2015년에는 보고서 출간 직전 관련 정보가 기업에 흘러들어가 발간 자체가 무산되기도 됐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연구기관의 쓴소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는 정부도 마찬가지다. B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지난해 초 ‘금융당국의 구조조정 드라이브가 약하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냈다가 (정부로부터) 혼쭐이 났다”며 “아무래도 정부 용역을 먹고 사는 국책기관으로서 (연구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우리 경제의 ‘위기경보 시스템’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2012~2013년 중후장대 산업의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보고서가 심심찮게 나왔지만 기업·정부 할 것 없이 이를 반박하거나 감추기에 급급했다. 산업분석·정책자문을 하는 연구기관 등에 대한 부당한 압력 행사는 예삿일처럼 벌어졌다. 수수료를 기업으로부터 받는 신용평가사나 회계법인 등과 달리 연구기관은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객관적 시각을 견지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C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은 “산업의 볼륨이 커지고 패러다임도 변화면서 싱크탱크의 의존도는 높아지는 추세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기업경영과 전략의 실패를 보완해줄 우리 사회의 점검 시스템이 취약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생각 다르면 ‘항명’ 취급…울지 못하는 ‘탄광 속 카나리아’

보고서 출간 앞두고 정보 유출…발간 자체 무산


국책硏-정부 회전문 인사도 ‘쓴소리’ 막는 원인

‘구조조정 첨병’ 맡은 국책硏 독립성강화 발등의 불



정부가 문제와 해법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쉬쉬하는 분위기에 젖어 있다는 게 문제다. 취약업종의 글로벌 과잉공급 이슈도 정부는 이미 수년 전에 심각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실제 정부는 지난 2012년 철강 분야에서 관련 주제로 용역을 발주했다. 당시 용역을 맡은 민동준 연세대 교수는 “2012년 기준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설비과잉 규모가 2억7,000만톤 수준으로 공급과잉 현상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며 “마진 압박이 현실이 된 만큼 과잉공급 해소를 위한 동북아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국내 업종 고도화를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철강산업의 현실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동부제철 등이 지지난해 말부터 채권단의 요구로 전기로를 돌리지 않는 정도의 미시적 변화만 있을 뿐이다. 정부가 위기신호를 감지하고도 정작 필요한 행동을 취하는 데는 주저한 셈이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단기성과에 혈안이 된 기업 최고경영자(CEO)나 구조조정 실행 수단이 없다는 말만 반복한 정부 모두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며 “지금 잘나가는 기업에 (연구소가) 쓴소리를 할 수 있고 그런 비판을 받은 쪽도 스스로 둘러볼 수 있어야 선순환 구조가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책연구기관과 정부 간에 회전문 인사가 만연한 점도 보고서 독립성을 침해하는 한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개발연구원(KDI)·금융연구원 등에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 등 경제부처 출신 관료가 대거 포진되면서 정부에 직언을 하기 힘든 구조다. 예를 들어 국책연구기관이 경기나 산업 전망 등과 관련해 정부와 조금만 다른 시각을 밝히면 곧바로 ‘항명’으로 해석될 정도다.

우려되는 대목은 연구기관 등이 ‘탄광 속 카나리아’ 역할을 해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정보량부터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국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정보독점은 강화됐지만 데이터 수집이나 공개와 관련한 제도 정비가 더뎌지면서 연구소 입장에서 활용 가능한 정보는 재무제표와 수급분석 정보에 불과하다”며 “정보가 극히 한정적인 상황에서 조기 경보가 쉽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연구인력 공백도 현실이 되고 있다. 산업연구원만 해도 외환위기 당시 250여명에서 220여명으로 연구원이 줄었다. 최근 충원도 줄어 고령화 문제 또한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앞으로 조선·해운 구조조정에 10조원 이상의 공적자금 투입이 예상되는데 좀 더 일찍 경고 사인에 주목했더라면 국민 혈세 투입이 줄었을 것”이라며 “최근 수년간 중국이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구조조정 수요가 상시화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미비점을 정비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이상훈·박홍용·이태규기자 shlee@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