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에 왔을 때보다는 많은 것들이 명확해(clear)지고 있어요. 한겨울보다는 봄이 더 즐겁더군요. 여름의 더위는 기다려집니다만 장마는 좀 상상이 안됩니다. 하하, 농담이고요. 한국의 미술계는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어 나 또한 적응 중이지만 그러한 현실을 알면 알수록 참여할 계기가 더 많습니다.”
마리 관장은 정부가 지난 2000년 개방형 직위제도를 도입한 후 공모를 통해 외국인이 기관장으로 임명된 첫 사례다. 국제현대미술관위원회(CIMAM) 회장을 맡고 있던 그가 하마평에 오르자 고질적인 학연 기반의 파벌을 잠재울 ‘미술계의 히딩크’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 한국 미술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국제 경쟁력을 도모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우려가 엇갈렸다. 급기야 그가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할 당시 스페인 군주제를 직설적으로 풍자한 출품작의 철수를 지시하며 전시 자체를 취소하고 담당 큐레이터를 해고한 사실이 알려져 ‘검열’ 논쟁이 불붙었다. 작가가 주축이 된 국내 미술계 800여명 인사가 ‘국선즈(국립현대미술관장 선임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라는 이름으로 성명을 냈고 관련 사실에 대한 해명과 윤리선언을 요구했다. 독립성이 보장돼야 할 예술기관의 수장이 ‘검열’ 논란에 휘말린 것은 전문성을 무색하게 할 수 있을 만한 약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1년 이상 공석이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에 취임한 그는 “어떠한 검열도 반대하며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예술이 삶을 바꿔놓지 못한다면 가치 없는 일입니다. 미술·예술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바꾸고 세계를 바꿀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변화라는 게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거든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마리 관장은 미술보다는 오히려 현대문학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독일인 예술비평가가 바르셀로나에 화랑을 여는 과정을 도왔던 게 미술계 진출의 계기였다. 화랑은 곧 문을 닫았지만 미술에 대한 관심과 글재주가 더해져 평론을 꾸준히 썼고 1989년 벨기에로 건너가 브뤼셀 현대건축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글과 그림과 음악을 사랑하는 그에게 큐레이터는 낯선 직업이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도 이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매력적이었다.
“미술과 로큰롤은 닮은꼴이에요. 아름다움(beauty)과 즐거움(fun)이 있죠. 둘 다 굉장히 시적이면서 몸을 움직여 춤추게 만드는 ‘보편적 언어’라는 점도 공통적이죠. 셰익스피어나 보들레르의 시가 없었다면 로큰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술은 세상을 아우르고 그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마리 관장은 예술이 변화의 힘을 갖는다는 일관된 주장과 함께 그런 까닭에 ‘좋은 예술가’란 변화의 전환점에 있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역사는 찰흙 같은 것이라 모든 세대가 다시 만들고 쓸 수 있습니다. 예술에 있어서는 마르셀 뒤샹이나 존 케이지처럼 미술의 형태나 관계 형성 방법에 있어 새로운 발명을 하는 사람들이 의미 있습니다. 나 자신이 어학과 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습니다. 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지평선’을 형성하고 상상할 수 없던 지평선 너머를 끄집어낸다는 게 예술활동의 흥미로운 지점이죠.”
난해한 현대미술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국제적 네트워크를 보유한 마리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세계적인 수준의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저력을 그 원천으로 꼽았다. “한국의 작가들이 훌륭하고, 한국의 미술계는 아시아에서 가장 성숙돼 있습니다. 미술계 역량에 비해 미술시장이 강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국경의 한계를 초월하는 글로벌 시장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이 상황에서 미술관의 역할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맥락을 제공하는 ‘링크(연결자)’가 되고, 우리 잠재력과 저력을 결과로 창출하는 것입니다.”
취임 초기부터 마리 관장은 한국 현대미술의 특수 상황을 서술할 고유한 어휘와 한국적 서사구조가 필요하다고 거듭 밝혔다. “유럽에서 생각했던 모던·아방가르드·컨템퍼러리라는 시대와 사조의 구분법이 한국 현실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근대는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있기 때문이죠. 현재의 정체성이란 직전 과거와 긴밀하기에 한국 만의 근대화와 변화 과정을 설명할 새로운 어휘와 연대기가 필요합니다. 탈식민주의·후기식민주의의 담론은 해방의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을 영원히 해방시키는 자유로움과도 연관 있기에 예술에서 중요합니다. 나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객관적 입장과 세계적 관점에서 이런 맥락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1970년대 단색화를 1950~1960년대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1980년대의 민중미술을 1970년대 세계적으로 나타난 정치적 팝아트와 연결지어 본다면 한국 현대미술의 맥락과 서사구조가 분명해진다. 이에 마리 관장은 “그간 작가 개개인으로 드러나던 것을 그들이 스타일과 조형적 유사성을 넘어 한국 현대미술의 큰 틀에서 어떤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며 “작가는 떠도는 단어가 아니라 큰 글의 맥락 속에 존재하는 단어이니, 우리(미술관)는 그 단어를 구성하는 문법을 발견해 서사구조를 제시하고 그 예술의 의미와 유용성을 찾아낸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마리 관장은 한국이 “재능 있는 인재의 인큐베이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이 꿈꾸던 아시아 미술시장의 주도권은 이미 중국과 홍콩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시장이 아닌 레지던시(작가 거주) 프로그램으로 경쟁력을 선점하자고 제안했다. “베를린 정부가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때문에 역량 있는 세계의 작가들이 베를린으로 모여들어 오늘날 베를린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거점이 됐습니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뿐 아니라 국제적인 작가들·큐레이터·비평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 우리 미술관과 레지던시가 재능 있는 사람들의 집결지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 미술관이 유명 거장(이를테면 피카소·모네·반고흐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와 미래에 투자하면 ‘내일의 거장’을 키워낼 수 있으니까요.”
지중해 기후와는 사뭇 다른 모기와 습기가 괴롭히는 뜨거운 여름임에도 그가 새 계절을 기다리는 이유는 이런 희망 때문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이호재기자
He is...
△1966년 스페인 이비사 출생
△198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대 철학 및 교육학과 졸업
△1996~2001년 네덜란드 비테 데 비트 아트센터 디렉터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스페인관 큐레이터
△2008~2015년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관장
△2014년~ 국제근현대미술관 위원회 회장
△2015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