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상가상 역경을 딛고 성공을 이루다

의류회사를 경영하던 셰릴 크루거는 자신의 기업을 설립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제과업체 셰릴 앤드 컴퍼니로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셰릴 크루거 Cheryl Krueger는 가난을 딛고 1억 달러 규모의 여성복 판매업체 리미티드 Limited를 경영하는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율을 갈망했고, 결국 쿠키 판매로 그 갈증을 풀었다. 올해 64세인 그녀는 제과제품 공급업체 셰릴 앤드 컴퍼니를 설립해 꿈을 실현해나갔다. 하지만 독립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법정 소송까지 간 이혼, 사업 파트너의 죽음, 9.11 테러가 번번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크루거는 회사를 잘 키웠고, 결국 2005년 4,000만 달러를 받고 1-800-FLOWERS에 회사를 매각할 수 있었다. 그녀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보자.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정말 좋았다. 나는 세 살 때부터 할머니에게 매달려 쿠키 굽는 법을 배웠다. 나는 어릴 적 오하이오 주 벨뷰Bellevue 농장에서 자랐다. 우리 집은 화장실이 집과 떨어져있을 정도로 가난했다. 부모님은 내게 농부에게 시집가라고 얘기했지만, 선생님이 용기를 북돋아줘 볼링 그린 Bowling Green주립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나는 학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캐릴 크레인Caryl Crane이라는 옷 가게였다. 원래 나는 가계 경제학(home-economics) 교사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크레인 여사가 “장사나 바이어를 하면 잘 할 것 같다”고 말해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졸업 후 1970년대 말부터 리미티드에서 일했다. 나는 개인 스케줄을 좀 더 마음대로 조정하고 싶어 늘 주변을 둘러봤다.

미시즈 필즈Mrs. Fields와 데이비즈 쿠키즈David’s Cookies의 사업을 보고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콜럼버스Columbus의 데이비즈 쿠키즈 프랜차이즈를 인수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25만 달러가 필요했다. 그래서 내 가게를 열기로 결심했다.

일하는 여성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는 그 곳에 큰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은행 문턱을 넘기가 힘들었다. 리미티드에서 1억 달러 규모의 사업을 운영했지만, 나는 미혼 여성이었고 이 분야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보유한 리미티드 주식을 3만 8,000 달러에 전부 팔았다. 그리고 대학시절 룸메이트 캐릴 워커 Caryl Walker에게 사업 파트너가 돼달라고 제안했다. 그녀가 5%, 내가 95% 지분을 소유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1981년 셰릴스 쿠키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1985년까지 리미티드와 차우스 스포츠웨어 Chaus Sportswear에서 일하며 쿠키 가게에 자금을 대야 했다. 또 매 주말마다 뉴욕에서 콜럼버스로 날아가 캐릴 대신 이틀간 일을 했다. 우린 개업 첫 해 40만 달러 이상의 매출과 5%의 세전 이익을 올렸다. 그리고 1982년 두 번 째 가게를, 그 이듬해엔 세 번 째 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땐 우리 둘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다. 결혼 생활은 1년도 가지 못했다. 그는 평생 이혼수당을 지급하라고 소송을 냈고, 법원은 일시적으로 회사 자금과 개인 자금을 동결시켰다. 결국 그 이혼은 조정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1985년 캐릴이 림프종과 골수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콜럼버스에는 암 전문 병원이 없어 치료를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내 집으로 들어왔고, 내가 맡아서 그녀를 간호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도 돌아가면서 그녀를 돌봤다. 그건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면,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깨닫게 된다.

나는1985년 12월 31일 리미티드를 퇴사했다. 그 후부턴 내 가게에 전력할 수 있었다. 캐릴은 몇 개월 후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녀가 소개해 준 존 그린John Green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우리는 미시즈 필즈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가 매장 부지에 입찰할 때마다 그들이 가격을 올려 점포 확보에 실패를 거듭하곤 했다. 그땐 확장을 하지 않으면 성장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은행에서 우리의 수익성을 보고, 자본을 확충하면 25만 달러를 대출해 줄 수 있다고 전해왔다. 나는 1986년 지인 노먼 트레저Norman Traeger에게 회사 지분의 3분의 1을 매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우리 대출에 대한 보증을 서주었다(나는 후에 그의 지분을 재매입했다).

나는 회사를 키우기 위해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마케팅 학부 학장인 로저 블랙웰Roger Blackwell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로저는 우리 마카다미아 코코넛 쿠키를 좋아했다. 그래서 2박스를 들고 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그는 ‘고객들이 선물 바구니와 구운 제과 제품을 좋아한다’는 것을 사례연구를 통해 밝혀내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우리는 1986년 브랜드를 바꾸기 위해 이름을 셰릴 앤드 컴퍼니로 변경하고, 브라우니와 머핀, 선물용 상자를 팔기 시작했다. 그것이 카탈로그와 기업 판매 부서를 만들게 된 큰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곧 기업으로부터 선물세트 800개를 주문받는 등 판매가 되기 시작했고, 연 매출을 90만 달러까지 늘릴 수 있었다.

1990년대는 그야말로 폭풍 성장의 시기였다. 우린 항공사에도 입점하고자 했지만 그들은 우릴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1992년 항공사 상업 박람회를 직접 찾아갔다. 구토용 봉지에 샘플 제품을 잔뜩 넣고, 그 위에 ‘토하려면 최고의 쿠키만 토해라’는 광고문구를 붙였다. 이에 대한 바이어들의 반응은 좋았다. 아메리칸 항공, 델타항공, US 에어웨이에서 5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9.11 테러가 일어났다. 한 순간에 항공사 주문 650만 달러가 날아갔고 그 후에도 이 매출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린 회사를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그래서 공격적으로 인터넷 비즈니스에 집중했다. 인터넷 사업은 1997년 시작했는데, 그땐 손익분기점을 이룰 만큼 비용을 줄인 상황이었다.

2002년 축하카드 전문업체 홀마크 카드Hallmark Cards가 상온에 오래 둬도 상하지 않는 쿠키(shelf-stable cookies)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 지분 일부를 인수했다. 그러나 2년 후 홀마크가 카드 사업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우리가 그 지분을 재매입했다. 그리고 1-800-FLOWERS가 제안을 해와 2005년4,000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했다. 나는 회사에 머물러 4년간 더 CEO를 역임할 수 있었다.

그후 나는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2012년 아들이 나를 라이프 서포트 Life Support라는 신생기업으로 불러들였다. 그 회사는 헛개나무-숙취 때 간 해독에 효과가 있다-에서 음료를 추출해 판매하는 곳이었다. 현재 나는 그 회사 지분 34%를 소유하고 있고, 사장으로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회사 운영은 언제나 내 스스로를 혁신하고, 깨어 있는 사고를 하고, 항상 젊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나의 조언
세릴 앤드 컴퍼니 창립자 세릴 크루거

비용을 줄이려면 스스로 하라.
우리는 식품 제조, 선물 제조, 혹은 콜 센터를 아웃소싱하지 않았다. 다른 분야도 스스로 할 수만 있다면 그만큼 돈을 절약할 수 있다.

이메일에 매몰되지 마라.
나는 지금도 답장해야 할 이메일을 1,408건이나 갖고 있다. 우선 순위를 정하는 건 매운 중요한 일이다. 젊은 세대들은 끊임없이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데, 그러면 전략적 사고는 언제 할 수 있겠는가.

‘마치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라.
나는 회사를 팔기 수년 전부터 이사회를 두고 마치 상장기업인 것처럼 행동했다. 매각 때 양도를 투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이사회는 일정 수준 이상의 금융 거래 원칙을 사내에 주입시켰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Interview by Dinah 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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