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가 1959년부터 1960년에 걸쳐 제작한 드로잉북 속 작품들.
김환기가 1959년부터 1960년에 걸쳐 제작한 드로잉북 속 작품들.
4년간 파리에 체류했던 화가 김환기(1913~1974)는 귀국을 앞둔 1959년 4월 1일 드로잉북을 펼쳐놓고 그간 구상해 온 새로운 작품세계를 풀어놓았다. 드로잉북의 앞부분에서는 형상이 뚜렷하던 달·산·구름 등이 점차 단순한 형태로 변하다 급기야 원과 삼각형 등 기하학적으로 변하는 양상을 볼 수 있고, 중반부 이후에는 그마저 사라지고 색연필로 찍은 점만으로 구성된 화면을 목격할 수 있다. 드로잉북에 명시된 마지막 날짜는 1960년 6월12일. 작가가 1년 이상 손에 쥐고 총 39점의 드로잉을 남긴 이 유작집은 한국적 자연이 반구상에 이어 기하학적 추상으로, 마침내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된 점화(點畵)시리즈로의 변화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최근 개막한 ‘애프터 드로잉’전에는 이들 김환기 작품을 포함해 이승조,김창열,박서보,정상화,김기린,윤명로,이우환 등 작고작가와 ‘단색화’ 거장 8명의 드로잉 및 회화 60여점이 걸렸다.
김기린의 드로잉(왼쪽)과 그의 대표작인 단색조 유화들.
‘물방울 화가’ 김창열의 드로잉은 전체적으로 어둡게 채색한 다음 바탕이 다 마르기 전에 닦아 내고 그 위에 점을 찍어 번져가는 모양새를 관찰한 과정을 보여준다. 종이에 흰 점을 찍고, 연필로 테두리를 둘러 물방울처럼 그린 ‘희끄무레한’ 드로잉 앞에서는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김기린은 드로잉의 과정을 대놓고 손풀기이자 ‘붓장난’이라 했다. 시인이었으나 화가로 돌아선 그의 드로잉은 검정 잉크를 큰 붓에 찍어 툭툭 던지듯 찍고 그은 흔적들이다.정상화의 연필소묘 드로잉(왼쪽)과 대표작인 단색조 유화들
정상화의 드로잉은 1978년과 1979년에 남긴 연필소묘의 종이작업인데, 여기서도 종이를 붙이고 다시 도려내는 작가 특유의 수행과정이 등장한다. 물감을 칠하고 또 떼내고 덧칠하기를 반복하는 유화 못지않은 완성도, 작은 사각형 하나하나에도 살아있는 화가의 필선이 놀라울 따름이다. 세련된 마무리로 일명 ‘파이프’ 연작을 남긴 이승조는 전통 한지의 뒷면에 먹으로 그리는 배채(背彩) 방식으로 미묘한 선의 번짐을 보여준다. 유화와는 사뭇 다른 서정성이 인상적이다.이승조가 한지에 그린 드로잉(오른쪽)과 이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 유화 작품.
1980년대 ‘얼레짓’ 시리즈로 유명한 윤명로는 직접 고안한 얼레빗 모양의 붓을 반복적으로 휘둘렀던 행위의 기록을 드로잉에 남겼다. 나란히 걸린 2000년대작 드로잉 또한 작가의 행위를 담고 있지만 도구와 움직임은 한층 자유로워졌다. ‘묘법’시리즈가 대표작으로 꼽히는 박서보지만 1980년대 드로잉은 마치 건축 설계도면을 보는 듯 분석적이고 치밀하다. ‘점’ ‘선’ ‘바람’ 시리즈의 이우환은 드로잉에서도 특유의 압축적인 필선과 여백의 미를 확인할 수 있다.이우환의 드로잉(왼쪽)과 유화
이번 전시의 자문과 평론을 위해 작품을 연구해 ‘김환기 드로잉북’의 연대기를 밝혀낸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는 “이들 드로잉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결정적 순간을 담고 있는 타임캡슐”이라며 “드로잉은 더이상 스케치나 습작처럼 보조적 매체가 아니라 작가의 과거 생각과 행위를 재구성하는 전면적 미술매체로 봐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김환기에게 드로잉은 ‘시간과 공간의 저장소’였고, 김창열과 김기린에게는 ‘감성의 저장소’, 정상화와 이승조는 ‘사색의 저장소’, 윤명로·박서보·이우환에게 드로잉은 ‘행동의 저장 또는 제어의 장’이었다”고 평했다. 전시를 기획한 도형태 갤러리현대 부사장은 “화가의 속내, 걸작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라 소개했다. 7월10일까지. (02)2287-3500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