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황의 열매는 보증료뿐만이 아니었다. A 부장은 “배 한 척을 짓는 데 기자재 수입부터 해서 어마어마한 거래들이 수반된다”며 “이 부대거래들을 RG를 맡은 은행들이 주선하게 되는데 그 수익도 굉장히 짭짤했다”고 말했다.
상품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없이 값싸게 환헤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만 현혹돼 2008년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던 당시 상당수 중소·중견기업이 거액의 손실을 입거나 일부는 흑자 도산까지 이른 파생금융상품 ‘키코’와도 그 맥락이 비슷하다는 게 은행권 안팎의 시각이다.
호황에 취해 있는 사이 조선사에 대한 은행의 익스포저 비중은 급격히 증가했다. 일반대출이 별로 없어도 RG 규모가 급격히 커졌기 때문이다. ‘조선 빅3’를 포함해 7개사의 RG 규모는 50조원(전체 익스포저 8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우조선해양만 봐도 농협은행은 총 익스포저의 90%, KB국민은행은 총 익스포저의 70% 이상이 RG에 해당한다.
‘망하지 않는 사업’이라는 자만심에 은행들은 재보험도 거의 들지 않았다. 현재 대우조선에 대한 시중은행 RG의 대부분은 재보험을 들지 않아 선주가 조선사 문제로 선수금을 요구하는 RG콜이 들어올 경우 은행이 전액을 물어줘야 하는 구조다.
RG콜은 표면적으로 노출된 리스크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막대해진 RG 규모가 시장 논리로 조선업을 구조조정하는 프로세스 자체를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은 대출해준 기업의 재무상태가 안 좋아지면 해당 기업 여신의 건전성을 재분류해야 한다. 부실채권으로 분류될 경우 자금지원이 끊기고 이 과정에서 기업의 생존이 어렵게 되면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이뤄진다.
하지만 RG 규모가 너무 크다 보니 금융당국도, 은행도 조선사 여신에 대한 건전성 재분류가 두려운 구조가 됐다. 수출입은행이 대우조선에 지원한 RG만도 7조원인데 이것을 부실채권 등급인 ‘고정’으로 분류해 충당금을 쌓으면 당장 수출기업을 책임지고 있는 수출입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수조원대 적자를 본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여신을 대부분의 민간은행들이 ‘정상’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조선사 채권단 사이에서는 일반대출이 미미하다고 해도 RG 규모가 크다면 총 익스포저 개념으로 간주해 해당하는 금액만큼의 책임을 지는 구조”라며 “RG만 많다고 해서 채권단에서 빠져나가거나 구조조정 시 손실을 덜 입겠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조선 쪽 금융시장에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금융당국과 은행은 RG가 해소되는 선박의 인도 시점까지 구조조정을 질질 끌면서 추가 자금을 지원하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댄다. STX조선해양 구조조정이 단적인 사례다. 구조조정이 지연된 데는 정치권의 입김도 컸겠지만 RG콜이 들어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은행들의 발목을 잡은 것도 한몫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RG가 기본적으로 선박을 발주하는 선주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계약이기 때문에 은행에 불리한 구조다. 국제적으로 RG는 어음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독립성’을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음의 독립성이란 어음행위의 전제가 되는 타인의 행위가 무효 또는 취소되더라도 해당 어음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쉽게 말해 선주가 배를 인도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선주 귀책사유 상황에서도 은행이 선수금을 돌려줘야 하는 RG 계약은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RG라는 계약 자체가 선주에게 상당히 유리한 구조라 분쟁 사유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수십조원에 달하는 은행권의 RG는 두고두고 국내 조선업 구조조정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증권은 최근 조선 구조조정 영향에 관한 보고서에서 “엄청난 규모의 RG 때문에 국내 조선업에서 워크아웃 이상의 구조조정 방안은 취해지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조선 구조조정의 카드가 너무 제한돼 있다는 것이다.
/윤홍우·김보리·임세원기자 seoulbird@sedaily.com
◇RG(선수금환급보증)는
선주는 선박을 주문한 후 건조비용을 조선사에 선수금으로 미리 지급하는데 RG(Refund Guarantee)는 이 선박이 인도되지 못할 경우 금융사가 선수금을 선주에 게 물어내도록 하는 안전장치다.
만약 선주와 조선소가 1억달러짜리 선박 건조를 계약했다고 하면 선주는 계약 당시 조선사에 선수금으로 계약금액의 20%인 2,000만달러를 조선사에 지불한다. 이와 동시에 조선사는 이 선수금에 대한 RG를 금융기관에서 발행받는다. 금융기관은 이 RG에 대한 수수료로 보증액의 0.03~0.05% 정도를 조선사로부터 받는다.
선주는 1억달러를 한번에 조선사에 주는 것이 아니라 ‘건조계약-착공-탑재-진주-인도’ 등 5단계 스케줄에 맞춰 각 단계마다 수주금액 20%의 대금을 지급한다.
즉 ‘진주’ 단계에서 선수금 지급 규모는 8,000만달러이며 이는 또 이 선박의 최종 RG 잔액이 된다. 나머지 2,000만달러는 배가 인도된 후 선주가 지불한다. 이 방식을 표준형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