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젠 지역은 일본에서 유명한 화산지대이자 온천 지역. 주변 경관도 빼어나 관광객이 요즘도 넘친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1934년)될 만큼 수려한 자연을 자랑하는 운젠 지역에서 화산 활동이 시작된 것은 기록상 701년부터. 기독교 탄압용으로 쓰인 적도 있다. 1637년 가톨릭 교도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 직후 도쿠가와 막부 정권은 선교사와 교인들을 뜨거운 온천에 빠트려 죽였다.
1792년에는 화쇄류가 인근 지역을 휩쓸어 1만5,000여명이 사망하는 대참사를 빚었다.** 1991년 운젠 화산이 전국민적인 관심을 끈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화쇄류가 다시 발생한 것인가?’에 모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화산 활동의 시작이 감지된 시기는 1990년 11월 중순. 4월부터 소규모 화쇄류 현상이 일어나고 5월 말 용암 분출이 확인되는 순간들이 각종 매체를 타고 거의 실시간으로 퍼졌다.
일본 정부는 화쇄류의 규모가 커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자 육상자위대를 동원해 주민 2만여명을 대피시켰다. 일부 피하지 못한 주민과 취재진이 화산 지대에 남아 있을 즈음,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당시 현장에서 취재하던 요미우리신문의 현장 기자가 송고한 기사의 일부.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뜨거운 바람이 닥쳐왔다. 화쇄류가 발생한 것은 언덕 위에 막 카메라를 설치한 직후였다. 엷은 갈색의 첫 연기가 뭉게뭉게 하늘로 치솟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주택가 쪽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1~2분후 굉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며 골짜기에 위치한 시마바라시 가미코바 지역에까지 밀려갔다. 거대한 화새류였다. 길가에 서 있던 소형트럭은 센 열풍에 굴러 넘어졌고 밭 사이에 점처럼 산재해 있던 주택도 일순 불꽃에 뒤덮여 갔다. 이윽고 화쇄류의 일부는 방향을 바꿔 언덕을 넘어 우리 쪽으로 밀려왔다. ‘도망쳐, 도망’. 언덕 위에서 화쇄류를 지켜보던 주민들이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화쇄류에 파묻힌다’. 우리는 근처에 있던 차를 탈 생각도 못하고 도망쳤다. 화산의 거대한 힘에 압도돼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해 기사를 송고한 기자는 극소수. 시속 100㎞의 속도로 쏟아진 용암과 200㎞가 넘는 화쇄류의 불 연기 속에 43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일반 주민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는 점. 주민 소개 작업을 펼치던 소방관과 경찰들이 각각 2명씩 죽었다. 외국인 화산학자들도 3명이 희생됐다.*** 가장 많이 죽은 집단은 보도진이었다. 16명 사망.
보다 생생한 기사 한 줄, 몇 장의 사진 컷을 위해 그들은 용암, 화쇄류와 목숨을 바꿨다. 6월 6일 요미우리신문과 마이니치신문에는 죽음을 마다하고 촬영한 현장 사진이 실렸다. 필름은 사진기자들이 불구덩이와 고열가스에 쓰러지면서 목숨보다 소중한 듯 품에 안고 있던 카메라에 들어있었다. 기자들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타고 그슬렸으나 카메라에 담긴 몇 커트의 필름은 600℃의 고열에도 기적적으로 남았다. ****
인간의 열정이 용암보다 뜨거웠기 때문일까. 화쇄류와 용암 분출이 점차 약해지더니 1995년부터는 화산의 연기마저 멈췄다. 드릴로 땅을 뚫어 용암을 채취한 사상 초유의 실험(2003년)에서 운젠 지하 용암의 온도는 섭씨155도로 예상했던 500도보다 훨씬 낮았다. 화산폭발 위험이 그만큼 적어졌다는 얘기다.
운젠화산의 화쇄류가 진정되면서 일본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언론의 지나친 경쟁에 고귀한 인명이 희생됐다는 비판과 언론은 무엇이든 취재해 보도할 의무가 있다는 옹호론이 맞섰다. 뾰족한 결론이 나지 않은 가운데 2005년 운젠 화산에서 죽은 기자들이 또 한번 국민들을 울렸다. 운젠의 산 속에서 기자들의 최후가 담긴 영상이 발견된 것이다. ‘봉인 풀린 운젠 화산 378초의 유언’이라는 기록물에 일본인들은 눈물을 훔쳤다.
운젠화산을 넘어 우리를 본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헌신하는 경찰관과 소방관이 많으리라 믿는다. 의문도 있다. 내일 죽더라도, 연구 현장이 위험해도 목숨 바쳐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자와 교수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목숨과 보도를 맞바꿀 수 있는 기자가 얼마나 될지에는 더욱 자신이 없다. 운젠화산의 죽음에 감동하며 결의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부끄러운 부채만 쌓여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화산재와 용암 덩어리 등이 가스나 수증기와 함께 시속 수백㎞ 이상의 속도로 분화구로부터 산 밑으로 퍼지는 현상을 말한다. 지표에 나와 굳은 용암이 다시 분출한 용암에 밀려 산밑으로 굴러 떨어질 때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화산 폭발시 화쇄류도 종종 발생하지만 규모가 큰 화쇄류는 용암이 흘러내리는 용암류보다 위험하다. 온도가 수백도℃로 높은 데다 속도가 빠르고 양도 많아 순식간에 한 지역의 생물을 태우거나 호흡 불가능 상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악의 화쇄류 피해는 1902년 서인도제도의 프레화산 폭발 당시 발생했다. 당시 화쇄류가 산밑도시를 덮쳐 2만9,000여명이 숨졌다.
** 화산 폭발 직후 쓰나미까지 시마바라 지역을 덮쳐 5,000명 인명 피해와 수많은 시설을 파괴했다. 새로운 연못이 생기고 호수의 크기가 줄었다. 인근 해역의 작은 섬들은 육지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일본 사회가 운젠 화산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에는 화산 폭발에 화쇄류, 쓰나미까지 함께 몰려 올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 외국인 학자 3명은 프랑스 화산학자인 카띠아(49세)·마우리스(45세) 크라프트 부부와 미국인 학자 해리 글리켄(33세). 크라프트 부부는 화산 폭발 전문가로 연상연하 캠퍼스 커플이었다. 사고와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죽기 하루 전에 마우리스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비디오 테이프로 남아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23년간 화산 폭발지대를 누볐으니까. 설령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내 일을 다할 것이다.”
**** 일본경제신문 6일자 사회면 톱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실렸다.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덮쳐오는 화쇄류. 운젠 후겐화산 취재중 순직한 본사 구로다기자(34)는 애용하던 카메라를 껴안은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 필름은 기적적으로 고열을 피해 취재진을 덮치기 직전의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이 전한 다이나카기자(54세)의 마지막 사진을 소개하는 사회면 톱 기사는 더한 감동을 안겼다. “렌즈는 화쇄류를 잡고 있다. 화쇄류의 맹위 속에서 그가 몸을 바쳐 지킨 필름에는 자신의 목숨을 빼앗은 화쇄류의 모습이 7장이나 찍혀있었다. 사체는 80∼200㎜의 줌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꼭 껴안듯 엎드려 있었다. 사진기자 생활 22년. ‘책상위에서 일하는 것은 싫다’며 늘 취재일선을 고집해왔던 그가 남긴 사진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화쇄류가 담긴 필름 7장면이었다.
다이나카 기자의 뒷 얘기는 더욱 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화산폭발현장은 그가 소속된 오사카 본사의 관할이 아니라 서부본사 지역인데도 자원해서 현장으로 뛰어갔다. 그는 취재할 대상이 있으면 어디든 가는 사람이었다. 사내에서 데스크를 맡아 내근 근무할 수 있는 데도 현장을 고집했다. 그가 남긴 7커트의 필름은 화산폭발이 시작된 3일 하오 4시 직전부터 4시 8분 사이에 폭발현장 500m 거리에서 찍은 것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화산재와 연기가 격심해지는 상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는 숨이 막히는 데도 사진설명을 위한 메모까지 남겼다. 그의 메모는 반 이상 타버려 일부는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카메라를 품고 쓰려졌다. 손으로 코를 막고 있는 다른 시체들과는 달리 그의 손은 카메라를 향한 채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굽어져 있었다. 현장에 달려가 그 모습을 목격한 그의 부인은 두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최후까지 기자였다.’